도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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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인물
삼국시대 고구려 태조왕대 고구려에 투항한 갈사국의 왕족.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주요 관직
갈사국 왕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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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도두는 고구려 태조왕대 고구려에 투항한 갈사국의 왕족이다. 태조왕 16년(68)에 갈사왕의 손자 도두는 국(國)을 들어 항복하고, 고구려로부터 우태(于台)의 관등을 받았다. 우태는 이른바 고구려 나부(那部)의 지배 세력에 수여한 고위 관등이다.

키워드
정의
삼국시대 고구려 태조왕대 고구려에 투항한 갈사국의 왕족.
가계 및 인적 사항

도두(都頭)는 갈사국(曷思國) 왕의 손자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부여왕 대소(帶素)가 고구려에게 죽임을 당하자, 대소의 동생이자 금와왕(金蛙王)의 막내 아들은 부여가 장차 망할 것으로 판단하고, 따르는 자 백여 명과 함께 부여를 떠나 남하하였다. 고구려 대무신왕 5년(22) 4월 도두는 압록곡(鴨綠谷)에 이르러, 사냥 나온 해두국(海頭國)의 왕을 죽이고 그 백성들을 빼앗아 갈사수(曷思水)가에 가서 나라를 세웠다. 이것이 곧 갈사국이고, 도두는 그의 손자이다.

내용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왕 16년(68) 8월조에 "갈사왕의 손자 도두가 국(國)을 들어 항복하여 왔다. 도두를 우태(于台)로 삼았다."라고 전한다. 도두가 받은 우태를 고구려 국왕 직속의 관료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대개 독립된 기반을 갖는 친족 공동체의 장 혹은 수장층에게 수여된 관등으로 이해한다.

1~3세기 고구려가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주변국들이 고구려에게 복속된 뒤, 이른바 고구려의 나부(那部)로 재편되었다. 우태는 패자(沛者) 등과 함께 나부의 지배 세력에게 수여된 관등 중 하나이며, 조의(早衣)보다 상위, 패자보다는 하위의 관등이다.

대무신왕 5년(22)에 고구려에 투항한 부여왕의 종제(從弟)가 만여 명을 이끌고 왔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백여 명으로 출발한 갈사국왕의 세력 규모는 도두대에도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므로, 도두에게 패자가 아닌 우태가 수여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삼국지(三國志)』 고구려조에는 '우태(優台)'로 표기되며, '상가-대로-패자-고추가-주부-우태-승-사자-조의-선인'의 순서 가운데, 여섯번째로 등장한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
『삼국지』

단행본

여호규,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신서원, 2014)
임기환, 『고구려 정치사 연구』(한나래, 2004)
김철준, 『한국고대사회연구』(지식산업사, 1975)

논문

武田幸男, 「高句麗官位制の史的展開」(『朝鮮學報』 86, 朝鮮學會,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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