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왕 16년(68) 8월조에 "갈사왕의 손자 도두가 국(國)을 들어 항복하여 왔다. 도두를 우태(于台)로 삼았다."라고 전한다. 도두가 받은 우태를 고구려 국왕 직속의 관료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대개 독립된 기반을 갖는 친족 공동체의 장 혹은 수장층에게 수여된 관등으로 이해한다.
1~3세기 고구려가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주변국들이 고구려에게 복속된 뒤, 이른바 고구려의 나부(那部)로 재편되었다. 우태는 패자(沛者) 등과 함께 나부의 지배 세력에게 수여된 관등 중 하나이며, 조의(早衣)보다 상위, 패자보다는 하위의 관등이다.
대무신왕 5년(22)에 고구려에 투항한 부여왕의 종제(從弟)가 만여 명을 이끌고 왔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백여 명으로 출발한 갈사국왕의 세력 규모는 도두대에도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므로, 도두에게 패자가 아닌 우태가 수여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삼국지(三國志)』 고구려조에는 '우태(優台)'로 표기되며, '상가-대로-패자-고추가-주부-우태-승-사자-조의-선인'의 순서 가운데, 여섯번째로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