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축성술이 발전하면서 성곽은 더욱 견고해졌다. 이에 따라 튼튼한 성곽을 공격하기 위한 공성무기(攻城武器)도 발달하기 시작했다.
성을 원거리에서 공격하기 위해 돌을 날릴 수 있는 투석기(投石機), 대형의 노를 수레에 고정시킨 상자노(床子弩) 등이 개발되었다. 성안을 정찰하기 위해 위아래로 오르내릴 수 있는 소차(巢車)와 망루차(望樓車)가 만들어졌으며, 성 앞의 해자를 건너기 위해 호교(濠橋)와 절첩교(折疊橋) 등이 제작되었다. 그리고 성벽으로 접근하기 위해 방호벽을 두른 수레인 분온차(轒轀車), 성벽을 오르기 위해 사다리 모양의 운제(雲梯), 성문을 망치처럼 때려 부수기 위해 당차(撞車) 등이 개발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의 상쟁이 격화되면서 방어성들이 늘어났고 공성전의 비중도 높아졌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중국의 공성무기가 도입되고 새롭게 개발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충차(衝車)가 생산된 것으로 파악된다.
충차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나 『고려사(高麗史)』 등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현존하는 유물이 없어 그 구체적인 형태는 알기 어렵다. 장방형의 수레 위에 성문을 때려 부수기 위해 당목(撞木)을 설치한 당차(撞車)가 기본적인 형태였을 것이다. 이후 당차에 탑승한 병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덮으면서 점차 대형화되고 종류도 다양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에는 사설당(四設幢)이 설치되었는데, 노당(弩幢)·운제당(雲梯幢)·충당(衝幢)·석투당(石投幢)이 그것이다. 사설당의 명칭에 ‘설(設)’이라는 용어가 포함되어 있는 점에서 이들은 공성무기를 제작하고 보급하는 부대로 인식되고 있다. 이 가운데 충당은 충차(衝車)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던 부대로 추정된다.
중국의 경우 일반적으로 충차라고 하면 성문을 부수고 성벽의 여장(女牆)을 공격하는 공성탑으로 인식되고 있다. 대형 공성탑은 5층으로 구성되어 그 안에 대형의 노(弩)나 포(砲) 등 공성무기를 탑재하였으며, 성문이나 여장을 공격하기 위한 당목과 성벽으로 넘어가기 위한 천교(天橋) 등이 설치되었다. 공성탑의 외부에는 물에 적신 동물가죽 등을 덮어 씌워 화공(火攻)에 대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