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三國史記)』 온조왕 즉위년(서기전 18)조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시조 온조는 강 남쪽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온조왕 13년 · 14년조에는 도읍이 하북(河北), 즉 강 북쪽에 있다가 하남(河南), 즉 강 남쪽으로 옮긴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하남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위례성은 하남위례성이라는 견해와 위례성이 하북에서 하남으로 이동하였다고 보는 설이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한강 북쪽에서 하북위례성으로 지목할 만한 고고 자료는 확인되지 않고, 온조왕 즉위년조 외에도 온조왕 8년 · 13년 · 41년조와 책계왕 원년(286)조에는 위례성으로 기록되어 있어 실제로는 처음부터 강 남쪽의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 백제 건국 초기의 도성의 명칭은 위례성인데, 위례성이 강 남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하남위례성이라는 고유명사처럼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위례성이라는 명칭의 유래와 의미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성곽을 의미하는 ‘우리’ 또는 ‘울타리’에서 유래하였다는 견해, 한강의 별칭인 아리수(阿利水) · 욱리하(郁里河)에서 기원하였고, 아리 · 욱리가 ‘크다’는 뜻이므로 ‘대성(大城)’을 의미한다는 견해, 백제에서 왕을 지칭하는 어라하(於羅瑕)에서 유래하여 왕성 내지 대성을 의미한다는 견해 등이 있다.
한수 남쪽의 위례성, 즉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일찍이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으로 비정되어 왔으나, 정약용이 고증학적인 방법론을 도입하여 한강 유역설을 주장한 이후 한강 유역이 주목되어 왔다.
한강 남쪽의 서울특별시 강남구-송파구-강동구 일대와 경기도 하남시 일대는 『삼국사기』 기록에 나오는 자연조건과도 대체로 일치한다. 『삼국사기』 온조왕 원년조에 나오는 것처럼 북쪽으로 한강을 끼고 있고, 동쪽으로 높은 산이 막고 있으며, 남쪽으로 비옥한 들판이 펼쳐져 있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까지 이를 수 있는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일대설이 대세를 이루다가 1970~1980년대 서울 지역에 대한 고고학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한강 남쪽의 백제 유적들이 주목을 받았다. 몽촌토성의 발굴이 시작되면서는 하남위례성을 몽촌토성으로 비정하였으나, 1997년부터 서울 풍납동 토성 내부와 성벽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현재는 대체로 서울 풍납동 토성을 하남위례성으로 보고 있다.
서울 풍납동 토성은 1925년 대홍수 때 유실된 것으로 알려진 서벽 일부를 제외하고 북벽과 동벽, 남벽 등 약 2.1㎞ 정도가 남아 있다. 유실된 서벽을 포함한다면 전체 둘레 3.5㎞ 정도의 거대한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2011년 동쪽 성벽에 대한 발굴 조사에서 성벽이 너비 43m, 높이 11m(증축 시 13.3m) 이상의 판축 공법으로 축조되었고, 연인원 138만 명 이상 투입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 동쪽 성벽 외측에서 성내천의 지천을 이용한 못를 확인하였고, 2017년부터 이루어진 서쪽 성벽 유실 구간에 대한 조사를 통하여 문지(門址)와 함께 외벽 포함 너비 50m 이상의 성벽을 찾을 수 있었다.
성벽의 축조 시기는 종래 서기전 1세기~3세기로 보기도 하였으나, 2011년 발굴 성과에 대한 분석을 통해 3세기 중 · 후반 착공해서 증축 과정을 거쳐 5세기에 최종적으로 완성되었음이 밝혀졌다.
토성 내부에는 도로망을 갖춘 시가지가 조성되고, 왕궁을 비롯하여 국가 제의 시설과 왕실 창고 및 관청 지구와 관인의 주거 지구 등에 대한 공간 구획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성벽이 축조되기 전인 3세기 중반 이전에는 토성 내부에 3중으로 이루어진 환호취락(環濠聚落)이 있었다.
한성(漢城) 시기 백제의 도성은 위례성, 한성으로 불렸는데, 시기에 따라 명칭에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웅략 20년조에서 한성의 함락을 “위례를 잃었다.”라고 표현한 것처럼 위례성과 한성이 혼용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나, 위례성에서 한화(漢化)된 표현인 한성으로 변화하였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변화의 시점으로 근초고왕 26년(371) 한산으로 도읍을 옮긴〔移都漢山〕 사실에 주목한다.
이 기사의 의미에 대해서는 북성(北城, 서울 풍납동 토성)과 남성(南城, 몽촌토성)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형태의 도성인 한성이 출현한 것이고 이전의 왕성 체제에서 도성 체제로 전환된 것으로 보거나, 백제의 도성제가 위례성 단독의 궁성을 갖춘 체제에서 북성과 남성 두 개의 궁성을 갖춘 양궁성 체제로 바뀌었다고 보고 있다. 한성 시기 백제의 왕성이 북성과 남성의 이원적인 양성 체제를 갖춘 것으로 보는 데는 대체로 일치한다.
서울 풍납동 토성이 몽촌토성과 함께 한성 시기 백제의 도성임을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증거는 주변 유적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한강의 범람을 막고 외적으로부터 도성을 방어하기 위해 삼성동부터 암사동에 이르는 긴 구간에 걸쳐 쌓은 토성과 제방, 서울 풍납동 토성 서남쪽에 조성된 석촌동 · 가락동 · 방이동 등의 왕릉급 고분군 등이 중요한 근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