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계토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성은 수해로 유실되고 외성도 경지 정리 과정에서 대부분 성벽이 사라졌다. 남벽부만 비교적 잔존상태가 나은 형편이다. 잔존 성벽은 하단부 폭 30m, 상단부 폭 5∼6m, 외벽 높이 6∼8m, 내벽 높이 2∼6m 정도이다. 부속 시설로는 추정 문지 2개소, 고대지 2개소, 추정 수구지 1개소, 외옹성 1개소 등이 있다. 서벽이 유실되어 정확한 형태와 규모는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 잔존 남벽부를 기준으로 짐작하면 둘레는 약 1,858m정도로 파악되고 있다. 초축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성벽 내부로 짐작되는 지역을 발굴한 결과 4세기에서 5세기에 이르는 백제시대의 주거지가 출토되어 성벽의 축조시기도 이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된다.
육계토성 일대는 임진강이 북쪽으로 크게 굽어 흘러가며 남쪽으로 넓고 평평한 단구지대가 펼쳐져 있다. 단구지대의 기반암은 현무암으로 그 위로 진흙 충적층이 형성되어 있다. 이는 신생대 4기층으로 곳곳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고 있기도 하다. 육계토성 북쪽의 임진강은 수심이 낮은 여울이 형성되어 배를 타지 않고도 걸어서 건너갈 수 있다. 임진강은 용암대지를 침식하여 흐르는 곳이 대부분으로 강 양안에는 백리장성이라 부르는 절벽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이 중 도강이 비교적 쉬운 곳은 지류가 유입되면서 절벽을 침식하여 강으로 진입이 용이하면서 여울이 발달하였다. 이런 곳에는 고대부터 교통로로 활용되었으며 강변에 성이나 보루가 축조되어 군사방어시설로 활용되어 왔다. 육계토성도 이 같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성벽은 하단부에 2~4단 높이로 돌로 기단을 쌓고 그 위로 주변에서 흙을 가져다 다져 올려서 축조했다. 기단부를 쌓은 석재는 화강암과 현무암을 장방형으로 치석한 것이다. 육계토성 내부 일부지역에 대해서는 몇 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성 내부에서 ‘凸’자형 ‘呂’자형태의 백제시대 주거지가 출토되었다. 주거지 내부에서는 4세기후반에서 5세기에 걸치는 다양한 종류의 백제토기들이 출토되었다. 이 시기에 백제 마을이 이 지역에 자리잡았고 그 외곽으로 방어를 위한 토성이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주목된다. 다만 아직 성벽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성벽과 마을과의 관계를 명확히 밝히기 어렵다.
백제주거지 중 ‘凸’자형태의 한양대 2호 주거지 내부에서는 온돌시설과 판재로 만든 벽체가 확인되었다. 또한 이곳에서 사이광구호(四耳廣口壺), 장동호와 같은 고구려 토기와 대형 항아리, 철모, 찰갑 등도 출토되었다. 여기에서 출토된 고구려 토기들은 한강유역이나 양주지역에서 출토되는 고구려 토기에 비하여 좀 더 빠른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백제 마을에서 고구려토기가 출토되는 현상에 대하여 고구려군이 백제 마을이나 육계토성을 점령하여 군사기지로 활용하였을 가능성을 추정하기도 한다. 또한 고구려계 주민들이 이주하여 왔거나 교역을 통해서 고구려 토기가 유입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성 내부 일부만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축조시기를 백제시대로 단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내부에서 백제시대 이후의 유물이나 유구가 거의 출토되지 않고 성의 입지가 풍납토성 등 백제초기 평지토성과 유사하다. 이 지역은 호로하, 칠중하 등으로 불리며 백제 초기부터 말갈 및 낙랑 세력과 전투가 빈번하던 곳이다. 또한 4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군이 백제 한성으로 진입하는 길목이기도 하다. 아직 관련 근거라 더 확보되어야 하나 백제가 토성을 축조하여 전략적 요충지로 삼았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