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부여성에서 발해만 비사성에 이르는 삼국시대 고구려 후기 서부 국경 방어를 위해 축조한 성곽.
축성 배경
631년(영류왕 14)당나라 사신 장손사(長孫師)가 고구려에 와서,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경관(京觀 : 고구려 때 전사자의 시체를 한 곳에 모아 장사 지내고 그들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합동 분묘 비)을 헐어버린 사건은 고구려의 의구심을 한층 더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장차 당나라의 침략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그 해부터 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동북쪽으로는 부여성(扶餘城 : 지금의 農安)에서 서남쪽으로는 발해만의 비사성(卑沙城 : 지금의 大連)에 이르기까지 1,000리에 걸친 장성으로, 16년이라는 기간이 소요되어 647년에 완성하였다.
『삼국유사』에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주청(奏請)으로 천리장성이 축조되었다고 했으나, 『삼국사기』에는 영류왕의 명으로 연개소문이 642년 1월부터 그 공사를 감독했다고 한다.
어쨌든 천리장성의 축조는 연개소문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특히 이 공사를 감독하던 연개소문은 642년 10월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으로 들어가 영류왕을 비롯해 자신의 반대파를 대량 학살하고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어 무단 독재 정치를 실시하였다.
성격
즉, 천리장성은 고구려 변경에 있는 성 밖의 방어선에 축조된 것이 아니라, 각각의 변경 성곽들을 서로 연결시켜 놓은 형태였던 것이다. 천리장성으로 연결되어 있던 변경 지역의 기존 성곽들은 적의 침입을 막는 주요 방어 거점으로서의 구실을 하였다.
현황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유사(三國遺事)』
- 『구당서(舊唐書)』
- 『신당서(新唐書)』
- 『한국사강좌(韓國史講座)』-고대편(古代篇)-(이기백·이기동, 일주각, 1982)
- 「高句麗千里長城」(王健群, 『博物館硏究』 1987年 3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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