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6년당나라 태종이 즉위한 뒤부터 당나라와 고구려의 관계가 점차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세계 제국을 건설하려는 큰 야심을 품고 있던 태종은 본국의 군웅 세력을 완전히 진압하자마자 동돌궐 원정에 착수하는 등 주변 국가들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다.
631년(영류왕 14)당나라 사신 장손사(長孫師)가 고구려에 와서,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경관(京觀 : 고구려 때 전사자의 시체를 한 곳에 모아 장사 지내고 그들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합동 분묘 비)을 헐어버린 사건은 고구려의 의구심을 한층 더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장차 당나라의 침략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그 해부터 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동북쪽으로는 부여성(扶餘城 : 지금의 農安)에서 서남쪽으로는 발해만의 비사성(卑沙城 : 지금의 大連)에 이르기까지 1,000리에 걸친 장성으로, 16년이라는 기간이 소요되어 647년에 완성하였다.
『삼국유사』에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주청(奏請)으로 천리장성이 축조되었다고 했으나, 『삼국사기』에는 영류왕의 명으로 연개소문이 642년 1월부터 그 공사를 감독했다고 한다.
어쨌든 천리장성의 축조는 연개소문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특히 이 공사를 감독하던 연개소문은 642년 10월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으로 들어가 영류왕을 비롯해 자신의 반대파를 대량 학살하고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어 무단 독재 정치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천리장성 유구에는 성문·각루(角樓)·돈대(墩臺) 같은 일반 설비가 없는 것을 볼 때, 장기간에 걸쳐 고수하려는 방위선이 아니라 단지 변경 성곽들을 연결시켜 놓은 보조시설에 불과한 것으로서 당군(唐軍)의 동진(東進)을 저지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즉, 천리장성은 고구려 변경에 있는 성 밖의 방어선에 축조된 것이 아니라, 각각의 변경 성곽들을 서로 연결시켜 놓은 형태였던 것이다. 천리장성으로 연결되어 있던 변경 지역의 기존 성곽들은 적의 침입을 막는 주요 방어 거점으로서의 구실을 하였다.
중국 당국은 『봉천통지(奉天通志)』와 『회덕현지(懷德縣志)』에 기재된 천리장성에 관한 기록을 토대로 1971년에 조사한 결과, 보존 상태가 가장 좋은 삼황묘(三皇廟)와 동황화전자(東黃花甸子) 일대의 성벽은 너비가 6m, 높이가 2∼3m 가량 되는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은 토축성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