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진천도는 475년 백제가 고구려에게 한성을 빼앗기고 웅진(충청남도 공주)으로 도읍지를 옮긴 사건이다. 475년 9월 장수왕이 이끄는 3만의 고구려군은 한성을 불시에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살해한 후 주민 8천 명을 포로로 잡고 곧바로 철수했다. 왕자 문주가 동맹국 신라의 구원병 1만 명을 이끌고 도착했으나 한성은 이미 폐허가 된 상태였다. 문주는 폐허에서 왕위에 오른 후 그해 10월 웅진을 새 도읍지로 정하고 천도를 단행했다. 백제 역사상 정치·경제·문화적으로 큰 변화를 추동한 사건이다. 천도 후 100여 년이 지나 무령왕이 집권하면서 안정을 되찾았다.
백제의 웅진천도는 475년 9월 고구려의 한성 함락에서 발단이 되었다. 웅진천도는 고구려의 한성 공격이라는 외부의 충격에 의해서 그것도 1개월 만에 황급히 이루어졌다.
웅진천도가 이루어지게 된 배경은 개로왕대에 당면한 대내외적 요인에서 찾을 수 있다. 안으로 개로왕대의 무모한 전제권력 행사로 인해 지배세력 사이의 대립과 분열이 일어났다. 밖으로는 백제가 고구려와 북위(北魏)를 둘러싼 외교전에서 실패한 것이다. 개로왕이 472년 북위와의 교섭을 통해 고구려 공격에 원병을 요청하였는데 이러한 개로왕의 청병외교는 도리어 고구려를 크게 자극하여 백제 공격을 초래하는 결과가 되었다.
웅진천도가 고구려의 한성 공격으로 야기되었던 만큼 계속되는 고구려군의 군사적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는 관방의 요해처를 물색해야만 했다. 지금의 공주지역은 지리적으로 볼 때 북으로 차령산맥과 금강에 둘러쌓여 있고, 동으로는 계룡산이 막고 있어서 고구려와 신라로부터의 침략을 방어해 주는 천험의 요새지이다.
그리고 금강을 통해 서해로 나아갈 수 있고, 또한 남쪽에는 곡창지대인 너른 호남평야가 펼쳐져 있어서 관방 뿐 아니라 교통의 요지로서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특히 금강은 조세를 운반하거나 또는 대외활동을 하는데 유리하였다. 이러한 지리적 요건 이외에 웅진이 정치적인 측면에서 대세력가가 없었던 지역이라는 점 등이 고려되어 천도가 실행에 옮겨졌다.
475년 9월 고구려의 장수왕이 이끄는 3만의 고구려군이 한성을 불시에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살해한 후 백제 주민 8천 명을 포로로 잡고 곧바로 철수하였다. 이어 문주가 신라 구원병 1만 명을 데리고 도착하였을 때에는 고구려군이 이미 철수한 뒤였고 왕성 또한 파괴된 상태였다.
신라의 원병 1만 명을 이끌고 돌아온 문주는 개로왕의 패사로 인해 왕위가 비었기 때문에 일단 폐허 상태에 있는 한성에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폐허화 상태의 한성에서 국세를 유지해 나가기에는 어려운 상황이 가로놓여 있었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하에서 천도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웅진천도를 주도한 세력은 문주왕의 측근인 목협만치(木協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 그리고 해구(解仇)로 대표되는 해씨세력을 들 수 있다. 목협만치와 조미걸취는 천도 시에 문주왕과 함께 동행하였고, 해구는 천도 직후에 병관좌평(兵官佐平)에 임명되면서 권력을 농단한 사례에 비추어 볼 때 웅진천도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천도 이전부터 중앙의 백제 왕실로부터 금동관과 금동신발, 중국제 흑유도기(黑釉陶器), 고리자루큰칼〔環頭大刀〕등과 같은 위세품을 수여받은 공주 수촌리유적의 조영 세력이 주목된다. 중앙의 천도 주도세력들이 웅진 지역의 지역적 기반을 가진 유력한 재지세력과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웅진천도가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주왕은 그해 10월 새 도읍지를 확정하고 웅진천도를 단행하였다. 웅진천도는 긴박한 상황 하에서 한 달이 채 넘지 않은 비교적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정치적인 결단이었다는 점에서 여러가지 불안한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문주왕은 웅진천도를 단행한 후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과 지배세력 간의 대립과 갈등으로 인해 파탄 지경에 놓여 있는 국가를 시급히 재건해야 할 당면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리하여 국가 경영을 정상적인 궤도에 올려놓기 위한 여러 가지 계획을 마련하였다.
옛 왕도(王都) 한성에 거주했던 백성들을 귀족세력의 통제 하에 일정 지역에 분산시켜 수용 · 정착케 하는 일이 시급하였다. 그리고 새 도읍지 안에 왕궁을 비롯하여 도성 및 관아 등 지배층을 위한 여러 시설물들을 단계적으로 갖춰나가는 일에 착수하였다.
이후 동성왕대에는 왕도를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주변에 관방 시설을 단계적으로 설치하여 방어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이로써 웅진성은 행정의 중심지로서, 교통과 관방의 요충지로서 미흡하나마 왕도의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
웅진천도는 개로왕 당시 백제가 당면하고 있던 대내외적 요인에 의해 촉발되었다. 웅진천도 이후 6세기 초 무령왕이 집권하기까지 왕권의 쇠약화와 더불어 혼미한 정치운영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웅진천도는 백제사상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역사적 계기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웅진으로 천도하면서 정치적으로 한강유역권에 대신하여 금강유역권의 신진세력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고, 경제적으로 금강유역권이 적극 개발되어 새로운 수도의 경제 기반이 되었다.
한편 문화적으로는 북방문화적 성격이 점차 사라지고 중국 남조의 세련된 귀족문화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