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 위봉산성 ( )

건축
유적
국가유산
13세기 전반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위봉산에 있는 입보용 포곡식 산성.
유적
건립 시기
13세기 전반
관련 국가
고려 - 조선
관련 인물
남구만(南九萬), 박황(朴潢), 이상황(李相璜)
둘레
8.5㎞
소재지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완주 위봉산성(完州 威鳳山城)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사적(2006년 04월 06일 지정)
소재지
전북 완주군 소양면 산7-4번지 외 1-32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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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위봉산에 있는 완주 위봉산성(完州 威鳳山城)은 그동안 조선 초에 태조 이성계의 어진과 전주 이씨 시조의 위패를 봉안할 행궁을 지으면서 건립한 산성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고려 후기의 문인 임춘(林椿)의 문집 『서하집(西河集, 1922)』에 이 산성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위봉산성은 13세기 전반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위봉산성은 둘레 약 8.5㎞에 달하는 포곡식 산성으로 당시 정문의 기능을 했던 서문이 현재 복원되어 있다.

정의
13세기 전반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위봉산에 있는 입보용 포곡식 산성.
연혁

완주 위봉산성(完州 威鳳山城)은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에 있는 해발 557.8m 위봉산의 오른쪽에 있는 산성이다. 그동안 이 산성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해 조선 후기인 1675년(숙종 1) 전라감사(全羅監司) 권대재(權大載)태조 이성계의 어진과 전주 이씨 시조의 위패를 봉안할 행궁(行宮)을 지으며 건립한 산성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고려 후기의 문인 임춘(林椿)춘추관에 있을 때 남백 남구만(南伯南九萬)으로부터 위봉산 등 3개처에 성을 쌓는다는 보고를 받은 사실을 자신의 문집인 『서하집』(西河集, 1222)에 기록하여 두었다. 또한 『승정원일기』에는 순검사(巡檢使) 박황(朴潢)이 구미의 금오외성(金烏外城)을 증축하는 곳에 내려가려고 하니 완주 위봉산성의 형편도 직접 살피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완주 위봉산성은 1675년에 축성된 것이 아니라 13세기 전반에 축성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808년(순조 8) 전라감사 이상황(李相璜)이 위봉산성을 개축한 사실도 확인된다. 따라서 완주 위봉산성은 고려 후기에 입보용 산성으로 축성하였으며, 숙종 원년에 위급 시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 성을 개축을 하였고, 19세기 초에도 개축하여 조선 후기까지 사용한 것으로 파악된다,

형태와 특징

완주 위봉산성은 도솔봉(兜率峰), 문필봉(文筆峰), 사자봉(獅子峰), 만덕봉(萬德峰), 금지봉(金池峰) 등 위봉산의 험준한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쌓은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이 산성은 둘레가 약 8.5㎞에 달하는 대규모 산성으로 내부의 중심 평탄지에는 행궁지, 위봉사, 위봉마을이 있다.

서문의 측면을 통과하는 741번 지방 도로가 위봉마을을 지나 완주군 동상면 수만리로 이어지면서 산성을 서에서 동으로 관통하고 있다.

완주 위봉산성의 규모와 내용은 1871년에 작성된 「위봉진사례(威鳳鎭事例)」에 잘 나타나 있다. 행궁에 장자각(丁字閣), 죄익랑, 우익랑, 내신문(內神門), 외신문(外神門) 등이 있고, 성내에 진장비우헌(鎭將備虞軒), 연무정(鍊武亭) 등이 있었다. 성내에는 9개의 고을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전주부의 군기집물고 ‧ 화약고 ‧ 군향고 ‧ 염고(塩庫)가 있었으며, 익산군, 김제군, 금구현, 임실현, 고산현, 진안현, 용안현, 함열현의 군기고(軍器庫)와 군향창도 있었다. 성의 둘레는 5천 97파(把)로 이를 보(步)로 계산하면 35리에 이른다. 여첩은 2천 4백 61좌(坐)이다. 문은 동문 1칸, 서문 3칸, 북문 1칸이 있었으며, 남문은 없어서 남쪽으로는 통행하지 못하였다. 방축(防築)은 12곳이며 우물과 샘은 41곳에 있었다.

발굴경위 및 결과

지표조사를 통해 위봉산성의 정문 역할을 했던 서문 및 수구지(水口址), 행궁지 등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졌다.

서문은 1994년에 홍예문(虹霓門)과 문루, 반원형의 옹성(甕城) 등을 복원하였다. 그런데 서문을 발굴 조사한 결과 체성(体城) 외벽과 내벽의 기단부가 복원된 서문 ‧ 옹성과는 다른 방향이었다는 것이 드러나 복원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서문의 외벽은 판판한 석재를 기단석으로 깔고 그 위에 대형 석재를 체성의 1단으로 뒤물림하여 쌓았고 안쪽은 석재로 채웠다. 내벽은 대부분 결실되어 정확히 파악되지 않지만 지면 위에 대형 석재를 가로로 눕혀서 쌓은 후 뒤채움석을 세로로 놓아 축조하였다. 이처럼 체성 외벽에 기단석을 두는 방식은 조선시대의 축성법이다. 따라서 서문지는 조선시대에 다시 축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수구(水口)는 성 안쪽 구지의 표면에서 체성을 엇비슷하게 통과하여 외벽 기단석 위를 통과하는 개구식 형태이다. 판판한 판석을 깔고 판석의 양쪽 측면에 1단의 벽을 세운 후 덮개돌을 덮은 ‘ㅍ’자형으로 만들었다. 수구의 전체 길이는 1,160cm로 체성의 너비 7m보다 훨씬 길다.

행궁지에서는 진전(眞殿), 내신문, 좌익랑 ‧ 우익랑의 기초 시설, 계단 시설, 축대(築臺) 등이 조사되었다.

여장(女牆)은 전 구간에 걸쳐 군데군데 잘 남아 있다. 여장은 미석(楣石) 위로 6∼8단의 석재를 쌓아올린 평여장(平女牆)의 형태를 하고 있다. 여장은 높이 70∼80㎝, 너비 60∼70㎝ 규모로 조성되었다. 포루(砲樓)는 12개소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성벽의 일부를 특별히 돌출시키지 않고 자연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능선의 돌출된 지점이나 조망이 좋은 지점의 성벽 안쪽에 포루를 설치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서하집(西河集)』
『조선왕조실록』

단행본

전북문화재연구원, 『威鳳山城-지표조사보고서』(2003)
전북문화재연구원, 『완주 위봉산성-서문지 일대 발굴조사보고서』(2005)
전북문화재연구원, 『완주 위봉산성–행궁지』(2019)
전주문화유산연구원, 『완주 위봉산성 행궁지 추가발굴조사 보고서』(2020)

논문

박대길,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점령과 태조 어진의 위봉산성 보존」(『전북사학』 56호, 2019)
전주문화유산연구원, 「완주 위봉산성 성곽복원 정비사업 부지 내 수구지 발굴조사 약식보고서」(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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