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1872년(고종 9) 이모작. 왕의 초상은 조상 추모의 의미뿐 아니라 왕실의 영구한 존속을 도모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특히 태조는 나라를 연 개국시조로서 더욱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일국의 시조인 만큼 특별한 예우를 받아서 국초부터 따로 태조진전(太祖眞殿)을 설치하고 어진을 봉안했다. 서울의 문소전(文昭殿), 외방의 출생지인 영흥의 준원전(濬源殿), 평양의 영숭전(永崇殿), 개성의 목청전(穆淸殿), 경주의 집경전(集慶殿), 본관인 전주 경기전 등이 그것이다.
신숙주가 찬술한 『영모록(永慕錄)』을 보면, 당시 선원전(璿源殿)이라는 경복궁 내의 열성어진(列聖御眞) 봉안처에서 받들던 태조어진이 무려 26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태조어진은 전주 경기전의 태조어진 1본뿐이다. 이 어진도 1872년 당시 경기전에서 받들던 어진이 오래되어 낡고 해짐에 따라 영희전(永禧殿)에서 받들던 태조어진을 범본으로 하여 화사 박기준(朴基駿), 조중묵(趙重默), 백은배(白殷培) 등이 모사한 이모본이다. 태조 어진의 이모와 관련된 전 과정이 『어진이모도감의궤(御眞移模都監儀軌)』에 수록되어 있다.
조선태조어진은 익선관과 곤룡포를 착용한 채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正面交椅坐像]. 태조는 본래 무인으로서 풍채가 좋았다고 전한다. 태조 어진은 신장이 크고 당당한 모습으로 위풍당당한 군주의 위엄을 잘 표현하고 있다. 전체적인 형식은 현재 대만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의 명태조상(明太祖像)과 흡사하다.
이 어진은 이모본으로서 조선 초기의 초상화법을 충실하게 따르는 동시에 제작 당시의 화풍도 반영되어 있다. 화면은 전체적으로 정교하게 배채 처리하였다. 곤룡포의 윤곽선은 상당히 각지게 묘사되었다. 양쪽 트임으로 삐져 보이는 내공(內工) 및 첩리(帖裡: 철릭)의 형태는 장말손상(張末孫像)을 비롯한 조선왕조 초기 공신도상(功臣圖像)에서 익히 살필 수 있는 특징이다. 아래에 깔린 채전(彩氈: 채색한 양탄자)은 숙종조에 이르기까지 어진도사때 사용되어 왔던 것이다. 채전의 화면 위의 높이가 상당히 올라가 있어서 양식상 고식을 보인다.
용상 역시 화장사에 소장되었던 공민왕상에서 보듯이 화려한 용문향이 새겨져 있다. 고궁박물관에 전해 오는 용상과 유사한 형태로서,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 어진의 한 형식을 말해 준다. 익선관의 앞으로 튀어나온 부분과의 경계에 발색 효과가 보인다.
안면 처리 역시 정면에서 바라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목한 부위에 살포시 음영이 깔려 있는 점 등은 이모 당시의 화법을 보여 준다. 옷주름 처리는 곧은 직선으로 조선 초기 양식을 보이지만 선염(渲染) 효과가 선 둘레에 조심스럽게 나타나 있다. 하지만 이 태조어진은 전체적으로 볼 때 원본에의 충실함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어진은 국왕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하여 정면관이 제일 바람직하다. 하지만 정면관은 그려내기가 가장 어렵다는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참조해 보면, 이 어진은 정면관을 훌륭히 소화해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보(補) 및 견룡(肩龍)의 이금(泥金) 효과에 의하여 엄정한 품위를 잘 표현하였다. 태조 어진은 조선 왕실문화의 격조를 잘 보여주는 초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