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덕우(德雨), 호는 나옹(懦翁)·나헌(懦軒). 박소(朴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응복(朴應福)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박동열(朴東說)이며, 어머니는 정엄(鄭淹)의 딸이다. 사복시정(司僕寺正) 박동언(朴東彦)에게 입양되었다.
1621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24년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처음 벼슬길에 올라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를 거쳐 대사간·이조참의를 지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으며, 이듬해 청나라가 화의에 반대한 척화신(斥和臣) 17인의 압송을 요구하자, 격분한 박황은 “일대(一代)의 명사들을 모조리 호구(虎口: 호랑이의 굴)에 보낼 수 없다. 한두 사람만 보내고 버티자.”고 주장하여 15인은 무사할 수 있었다.
볼모로 가는 소현세자를 모시고 심양(瀋陽)에 갔다가 돌아와 1638년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이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그때 김상헌(金尙憲)·정온(鄭蘊) 등을 모함하는 자가 있으므로, 이의 부당함을 주장하다가 사직하였으나, 곧 대사간에 등용되고 또다시 심양에 불려갔다가 돌아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644년 심기원(沈器遠)의 역모에 연루되어 김해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 전주부윤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