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중기에, 도승지, 한성부좌윤, 형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피난할 때, 종묘서영(宗廟署令)으로서 역대 왕들의 신주와 왕실의 어보를 안전하게 모시고 행재소에 도착해 난이 끝난 뒤 종묘의 전례(典禮)를 모두 복구할 수 있게 하였다.
1596년 장령 · 사간 · 종부시정 · 헌납 · 집의 등을 거쳐 진위사(陳慰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호조 · 예조 · 형조의 참판을 지냈다.
이듬해 헌납 · 집의 · 동부승지 등을 거쳐, 1599년 도승지 · 병조참지 · 충청감사가 되었다. 이듬해 대사간으로서 사간 정곡(鄭轂), 헌납 최충원(崔忠元), 정언 이구징(李久澄) 등과 함께 성혼(成渾)이 산림학자(山林學者)로 대두하는 것을 막기 위해 관직 삭탈을 주청하였다.
1603년 주청부사(奏請副使)로서 명나라에 가서 왕비의 명복을 빌고 온 공으로 가자(加資)되고, 전(田) 15결과 외거 노비 3구를 상으로 받았다.
이듬해 황해도감사를 역임하면서 도내 백성들이 흉년으로 기근이 든 것을 염려해, 풍년이 든 호남 지방에서 곡식을 수송해 도민에게 나눠주고, 종자도 나눠주어 제때 뿌릴 수 있도록 조정에 건의하였다.
이어 충청도관찰사 · 강화유수 · 금산군수 · 광주목사 등을 지내고, 1607년 도승지가 되었다. 이듬해 인조반정으로 한성부좌윤 · 형조참판에 제수되었고, 1624년(인조 2)에는 임진왜란 때 왕실의 신주를 모신 공으로 자헌대부에 올랐다. 호성(扈聖) · 선무(宣武)의 원종공신으로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동명집(東溟集)』
- 『융경2년무진년증광사마방목(隆慶二年戊辰年增廣司馬榜目)』(국민대학교 성곡도서관[고350.48 융01])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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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본관 및 가계 : 『국조문과방목』 卷之八(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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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진사 급제 : 『융경2년무진년증광사마방목(隆慶二年戊辰年增廣司馬榜目)』(국민대학교 성곡도서관[고350.48 융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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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 문과 급제 : 『국조문과방목』 卷之八(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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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4
: 흉년 대책 건의 : 『선조실록』 181권, 1604년(선조 37) 11월 2일. "황해도 감사 권희가 연안·배천의 흉년에 대한 대책을 건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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