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희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중기에, 도승지, 한성부좌윤, 형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사열(思悅)
남악(南岳)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47년(명종 2)
사망 연도
1624년(인조 2)
본관
안동(安東)
주요 관직
형조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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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중기에, 도승지, 한성부좌윤, 형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열(思悅), 호는 남악(南岳). 권욱(權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권진(權振)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권상(權常)이며, 어머니는 나운걸(羅云傑)의 주1 지중추부사 권황(權愰)의 아우이며, 예조 판서 권협(權悏)의 형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68년(선조 1) 진사가 주2, 1584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주3, 한림 · 주서 · 전적을 거쳐 각 조의 낭관 및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의 벼슬을 지냈다. 이어 호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로서 『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피난할 때, 종묘서영(宗廟署令)으로서 역대 왕들의 신주와 왕실의 어보를 안전하게 모시고 행재소에 도착해 난이 끝난 뒤 종묘의 전례(典禮)를 모두 복구할 수 있게 하였다.

1596년 장령 · 사간 · 종부시정 · 헌납 · 집의 등을 거쳐 진위사(陳慰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호조 · 예조 · 형조의 참판을 지냈다.

이듬해 헌납 · 집의 · 동부승지 등을 거쳐, 1599년 도승지 · 병조참지 · 충청감사가 되었다. 이듬해 대사간으로서 사간 정곡(鄭轂), 헌납 최충원(崔忠元), 정언 이구징(李久澄) 등과 함께 성혼(成渾)이 산림학자(山林學者)로 대두하는 것을 막기 위해 관직 삭탈을 주청하였다.

1603년 주청부사(奏請副使)로서 명나라에 가서 왕비의 명복을 빌고 온 공으로 가자(加資)되고, 전(田) 15결과 외거 노비 3구를 상으로 받았다.

이듬해 황해도감사를 역임하면서 도내 백성들이 흉년으로 기근이 든 것을 염려해, 풍년이 든 호남 지방에서 곡식을 수송해 도민에게 나눠주고, 종자도 나눠주어 제때 뿌릴 수 있도록 조정에 주4.

이어 충청도관찰사 · 강화유수 · 금산군수 · 광주목사 등을 지내고, 1607년 도승지가 되었다. 이듬해 인조반정으로 한성부좌윤 · 형조참판에 제수되었고, 1624년(인조 2)에는 임진왜란 때 왕실의 신주를 모신 공으로 자헌대부에 올랐다. 호성(扈聖) · 선무(宣武)의 원종공신으로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국조방목(國朝榜目)』
『동명집(東溟集)』
『융경2년무진년증광사마방목(隆慶二年戊辰年增廣司馬榜目)』(국민대학교 성곡도서관[고350.48 융01])
주석
주1

본관 및 가계 : 『국조문과방목』 卷之八(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주2

진사 급제 : 『융경2년무진년증광사마방목(隆慶二年戊辰年增廣司馬榜目)』(국민대학교 성곡도서관[고350.48 융01])

주3

문과 급제 : 『국조문과방목』 卷之八(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주4

흉년 대책 건의 : 『선조실록』 181권, 1604년(선조 37) 11월 2일. "황해도 감사 권희가 연안·배천의 흉년에 대한 대책을 건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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