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확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여주목사, 좌부승지, 동부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사중(士重)
석계(石溪)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68년(선조 1)
사망 연도
1638년(인조 16)
본관
안동(安東)
주요 관직
동부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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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여주목사, 좌부승지, 동부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중(士重), 호는 석계(石溪). 생육신인 권절(權節)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권윤희(權胤禧)이고, 아버지는 권결(權潔)이며, 어머니는 김사근(金思謹)의 딸이다. 아들이 예조 참판 권우(權堣)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03년(선조 36)에 진사가 되고, 1611년(광해군 3)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으나 이이첨(李爾瞻)에 의해 기각당하였다.

이위경(李偉卿) 등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키려고 폐모론을 제기하자 사관(四館: 성균관·예문관·교서관·승문원)에 문서를 돌려 그들의 과거응시권을 정지하게 하였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중상모략을 받고 관직을 박탈당하였다. 뒤에 승문원에 복직되었다.

이이첨의 아들 이홍엽(李弘燁)이 대리시험으로 과거에 급제하자 이 사실을 폭로하여 또 삭직되었다. 그 뒤 곧 복직되었으나 1618년 폐모론이 일어나 이이첨 등이 백관을 위협, 궁궐에 들어가 정청(庭請)을 하였을 때 참여하지 않았다 하여 전적으로 전직되었다가, 그 뒤 후금과의 미묘한 관계로 평안도가 소란할 때에 평안도독운사(平安道督運使)의 종사관이 되어 나갔다.

고향에 돌아가 있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언이 되어 바른말을 잘하였다. 1625년(인조 3) 사간이 되고 이듬해 집의를 거쳐 길주목사가 되었다. 1629년에 승지·호조참의 및 해주·여주의 목사를 지냈다. 1632년에 좌부승지를 거쳐 이듬해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1636년 벼슬에서 물러나 아산의 농장에 머물렀다.

참고문헌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방목(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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