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섬

  • 역사
  • 인물
  • 조선 전기
  • 조선 후기
조선 중기에, 장례원행판결사, 부제학, 호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 삼휴자(三休子), 석촌(石村), 칠송(七松)
  • 퇴부(退夫)
인물/전통 인물
  • 본관청주
  • 사망 연도1620년(광해군 12)
  • 성별남성
  • 주요 관직호조참판
  • 출생 연도1562년(명종 17)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이정일 (울산대학교, 한국사)
  • 최종수정 2025년 05월 28일
해사록 / 경섬 미디어 정보

해사록 / 경섬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중기에, 장례원행판결사, 부제학, 호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퇴부(退夫), 호는 삼휴자(三休子) · 석촌(石村) · 칠송(七松). 경세청(慶世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경혼(慶渾)이고, 아버지는 경시성(慶時成)이며, 어머니는 박난영(朴蘭榮)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94년 홍문관정자를 제수받았고, 1598년 진주사(陳奏使)의 정사(正使)인 최천건(崔天健)을 따라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사헌부의 지평 · 장령과 사간원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1601년 남원부사가 되었다.

1607년 홍문관교리로서 통신사 여우길(呂祐吉)과 함께 통신부사가 되어 임진왜란 후 첫번째 사절로 일본에 건너가 국교를 다시 열게 하고 임진왜란 때의 포로 1,340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1618년(광해군 10) 호조참판이 되고, 이듬해 장례원행판결사(掌隷院行判決事)가 되었다. 학문이 뛰어나 삼사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부제학과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 - 『선조실록(宣祖實錄)』

  •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 『국조방목(國朝榜目)』

주석

  • 주1

    : 가계 : 『국조문과방목』 卷之八(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 주2

    : 문과 급제 : 『국조문과방목』 卷之八(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 주3

    : 통신사 일본행 : 선조실록214권, 1607년(선조 40) 7월 19일. "여우길·경섬 등이 일본에서 돌아오다"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콘텐츠 이용 안내

콘텐츠 수정 요청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주제
0 / 500자
근거 자료
첨부된 파일이 없습니다
파일선택

최대 5개, 전체 용량 30Mb 첨부 가능

작성 완료되었습니다.

작성글 확인

다운로드가 완료되었습니다.

다운로드할 미디어를 선택해주세요.

모든 필수 항목을 입력해주세요.

다운로드할 미디어가 선택되지 않았습니다.

다운로드 중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미디어 다운로드

  • 이용 목적을 상세히 작성하여 주세요.
    서비스 개선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표기 : [사진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이용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