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무왕의 조카이자 동시에 의자왕의 사촌 동생이다. 660년 사비성(泗沘城)이 나당 연합군에게 함락되고 의자왕이 신라에 항복하자, 도침(道琛)과 함께 주류성(周留城 : 현재의 韓山)을 근거로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왕자 부여 풍(扶餘豐)을 왕으로 추대하는 한편, 일본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동시에 서북부 지방 백제 유민들의 호응을 얻어 한때 사비성까지 쳐들어가는 성과를 얻었다.
당나라 장수 유인원(劉仁願)이 지키는 사비성을 포위하자, 당나라에서는 유인궤(劉仁軌)를 급히 파견해 구원하게 하였다. 그 결과 백제 부흥군의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복신은 임존성(任存城)으로 퇴진하였다.
이 때 복신은 “당과 신라가 백제 사람들은 다 죽이고 땅은 신라에 주기로 약속했다 하니, 어차피 죽을 몸이라면 싸우기나 하자.”라는 격문을 내걸고 백제 유민들의 호응 아래 여러 차례 나당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복신을 주축으로 한 백제 부흥군은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하는 틈을 타서 옹산성(甕山城 : 지금의 대전광역시 대덕구 장동에 있던 계족산성으로 비정됨)·사정성(沙井城 : 지금의 대전광역시 중구 사정동)·진현성(眞峴城) 등을 공격해 이를 탈환하였다. 그 밖에 신라군이 금강 상류를 통해 내려 보내는 군량 수송로를 차단해 나당 연합군은 한때 곤궁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복신은 도침과 반목해 도침을 죽이는 한편, 자기 세력을 믿고 장차 부여 풍까지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거짓 병을 핑계로 누워 있다가, 부여 풍이 문병 오는 것을 기다려 잡아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아챈 부여 풍이 먼저 부하들을 이끌고 가서 복신을 죽였다. 이와 같은 백제 부흥군 지도부의 분열로 전후 4년에 걸친 백제 부흥 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