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淵蓋蘇文)의 맏아들이다. 9세에 선인(先人)이 되었고, 15세에는 중리소형(中裏小兄)에 봉해졌다. 18세에 중리대형(中裏大兄)이 되어 국정을 주도했으며, 23세에 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에 임명되었고, 24세에는 장군직을 겸하였다. 28세에 막리지 겸 삼군대장군(莫離支兼三軍大將軍)이 되었다. 연개소문이 죽은 뒤 32세에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어 군국의 업무를 총괄하였다.
연남생은 아버지 연개소문의 대를 이어 대권을 장악한 뒤, 지방의 여러 성을 순시하였다. 이 틈을 타 동생 연남산(淵男産)과 연남건(淵男建)이 정변을 일으켜 수도를 장악하였다. 이후 아들 연헌충(淵獻忠)을 죽이고 왕명을 빌려 소환하자, 그는 국내성(國內城)으로 달아났다. 그 곳 세력을 규합해 중앙정부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먼저 오골성(烏骨城)을 치는 한편 당나라에 대형(大兄) 불덕(弗德)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어 중앙정부의 압력이 가해지자, 그는 남으로 내려가 수도를 치는 대신 서북 요동방면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대형 염유(冉有)에 이어 아들 연헌성(淵獻誠)을 당나라에 보내어 거듭 구원을 청하였다.
당나라는 계필하력(契苾何力) 등이 이끄는 군사를 보내어 그를 도왔다. 그는 휘하의 국내성 등 6개 성의 주민과 목저성(木底城) · 남소성(南蘇城) · 창암성(倉巖城) 등 3개 성의 백성을 이끌고 당나라에 투항하였다. 당나라는 즉시 그를 사지절 요동대도독 상주국 현토군개국공(使持節遼東大都督上柱國玄菟郡開國公) 식읍 3,000호에 봉하고, 고구려 원정군의 인도자로 삼았다.
평양성 함락 뒤, 그 공으로 당나라로부터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에 제수되고 변국공(卞國公) 식읍 3,000호에 봉하여졌다. 그 뒤 당나라의 수도에 거주하다가, 당군이 고구려부흥군 및 신라군과의 전쟁에서 패퇴해 676년 마침내 한반도에서 퇴각한 후, 재차 기용되었다.
당나라는 신라 세력의 진출을 저지하고 고구려 유민을 끌어들여 다시 한반도로 진출하기 위해 요동지역의 고구려 유민들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그런 방책의 하나로 677년 그를 요동으로 옮겨진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관리로 파견하였다. 그는 그 곳에서 고구려를 멸망시켰던 당나라를 위해 일하다가, 679년 안동도호부의 관사에서 46세로 죽었다. 뤠양[洛陽]에 묻혔고 그 지역에서 출토된 그의 묘지명(墓誌銘)이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