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삼국시대 고구려 연개소문의 장남으로 대막리지를 역임한 귀족.
개설
생애와 활동사항
당나라는 계필하력(契苾何力) 등이 이끄는 군사를 보내어 그를 도왔다. 그는 휘하의 국내성 등 6개 성의 주민과 목저성(木底城) · 남소성(南蘇城) · 창암성(倉巖城) 등 3개 성의 백성을 이끌고 당나라에 투항하였다. 당나라는 즉시 그를 사지절 요동대도독 상주국 현토군개국공(使持節遼東大都督上柱國玄菟郡開國公) 식읍 3,000호에 봉하고, 고구려 원정군의 인도자로 삼았다.
평양성 함락 뒤, 그 공으로 당나라로부터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에 제수되고 변국공(卞國公) 식읍 3,000호에 봉하여졌다. 그 뒤 당나라의 수도에 거주하다가, 당군이 고구려부흥군 및 신라군과의 전쟁에서 패퇴해 676년 마침내 한반도에서 퇴각한 후, 재차 기용되었다.
당나라는 신라 세력의 진출을 저지하고 고구려 유민을 끌어들여 다시 한반도로 진출하기 위해 요동지역의 고구려 유민들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그런 방책의 하나로 677년 그를 요동으로 옮겨진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관리로 파견하였다. 그는 그 곳에서 고구려를 멸망시켰던 당나라를 위해 일하다가, 679년 안동도호부의 관사에서 46세로 죽었다. 뤠양[洛陽]에 묻혔고 그 지역에서 출토된 그의 묘지명(墓誌銘)이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구당서(舊唐書)』
- 『신당서(新唐書)』
- 『한국금석문추보(韓國金石文追補)』(이난영, 중앙대학교출판부, 1968)
- 『역주한국고대금석문(譯註韓國古代金石文)』1(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1992)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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