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서북방의 요충지인 신성(新城)에서 수도인 국내성(國內城)에 이르는 교통로상에 배치된 중요 성의 하나이다. 『삼국사기』 지리지 4에 수록된 ‘목록(目錄)’에는 경암성(椋嵓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창암성에 관한 문헌기록은 고구려와 당(唐)과의 전쟁 기사에서 처음 나타나는데, 667년(보장왕 26)에 당군이 남소성(南蘇城)·목저성(木底城)·창암성을 공략한 후 남생(男生)의 군대와 합류하였다는 기사가 있으며, 뒤이어 남생이 가물성(哥勿城)·남소성·창암성 등을 들어 항복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즉 창암성의 위치는 남소성과 목저성과 마찬가지로 현 소자하(蘇子河)일대로 추정된다.
구체적으로는 신빈현(新濱縣) 이도하자촌(二道河子村)의 구로성(舊老城)이나 두목입자산성(頭木砬子山城)에 비정하는 견해가 유력한데, 환인의 오녀산성(五女山城)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고구려 멸망 후 당은 고구려 영역을 9도독부 42주(州)로 다스렸는데, 창암성은 그 중 42주의 하나로 편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