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서북방의 요충지인 신성(新城)에서 수도인 국내성(國內城)에 이르는 교통로상에 배치된 중요한 성의 하나이다. 목저성이 처음 축조된 시기는 잘 알 수 없으나, 신성이 축조된 뒤인 4세기 초 이후로 추정할 수 있다.
목저성이 문헌에서 처음 확인되는 것은 342년(고국원왕 12)에 ‘남도(南道)’를 통하여 고구려를 침공해온 전연(前燕)의 모용황(慕容皝)의 4만 군사와 고국원왕(故國原王)의 1만5천의 군사가 목저에서 격전을 벌인 기사이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군이 패배하여, 결국 수도 국내성이 함락당하고 왕후와 고구려인 5만 명이 전연으로 끌려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또 405년(광개토왕 15)에는 후연(後燕)의 모용희(慕容熙)가 거란(契丹) 침략에 실패한 후 고구려 목저성을 공격한 바 있다.
고구려 말기에 당(唐)과의 전쟁 과정에서 667년(보장왕 26)에는 당군이 남소성·목저성·창암성을 공략한 바 있고, 668년에 남생(男生)이 국내성 등 9성과 10만여 호(戶)를 이끌고 당에 투항할 때 목저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기록은 목저성이 국내성 방어선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고구려 멸망 후 당은 고구려 영역을 9도독부 42주(州)로 다스렸는데, 목저성은 그 중 42주의 하나로 편제되었다. 목저성의 위치는 중국 요령성 무순(撫順)의 고이산성(高爾山城)으로 비정되는 신성을 기준으로 하면, 현 소자하(蘇子河) 유역의 목기진(木奇鎭) 일대가 유력하다.
또는 신빈현(新濱縣) 이도하자촌(二道河子村)의 구로성(舊老城)이나 오룡촌의 오룡산성(五龍山城)에 비정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