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삼국시대 고구려 말기와 멸망 이후 고구려 유민으로 당나라와 무주 정권에서 활동한 관료.
가계 및 인적 사항
주요 활동
졸지에 권력에서 밀려난 연남생은 급히 국내성(國內城)으로 달아나 동생들에게 대항하였는데, 666년에 아들인 연헌성을 당으로 보내 자신의 투항 의사를 재차 밝히며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 당나라 황제 고종(高宗)은 연헌성을 종3품의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에 임명하여 돌려보냈고, 그해 6월에 당의 장수 계필하력(契苾何力)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연남생과 연헌성 부자를 데리고 당나라로 들어갔다.
679년에 아버지 연남생이 사망하였지만, 연헌성은 계속해서 당 조정에서 활동하였으며, 주로 군사적인 활동을 하였다는 기록이 많이 보인다. 679년에는 아버지 상중이었음에도 정양군토반대사(定襄軍討叛大使)에 임명되어 돌궐(突厥)을 토벌하는 작전에 투입되었으며, 686년에는 신무군대총관(神武軍大總管)에 임명되어 이민족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이끌고 군사 원정에 나서기도 하였다. 또 688년에는 용수도대총관(龍水道大總管)에 임명되어 이정(李貞)의 반란을 토벌하는 데 앞장섰다.
연헌성은 이러한 공로로 벼슬이 차례로 오르면서 690년에는 궁정 경비와 호위 및 의장(儀仗)을 총괄하는 정3품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에 올랐다. 691년에는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자신의 공덕을 새겨 낙양(洛陽) 황성 앞 광장에 구리기둥〔天樞〕을 세우는 공사에서 필요한 인력과 물자를 조달하는 일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692년에 혹리(酷吏)로 악명을 떨쳤던 내준신(來俊臣)이라는 자가 뇌물을 요구하였을 때 이를 거절한 일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모함을 받아 42세의 나이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가 모함을 받아 죽게 된 것은 당시 당나라의 혼란한 정치적 상황에 기인한 점도 있지만, 그가 본래 고구려 유민 출신이었다는 점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원전
- 『구당서(舊唐書)』
- 『삼국사기(三國史記)』
- 『신당서(新唐書)』
단행본
- 권덕영, 『재당 한인 묘지명 연구』 역주편(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21)
- 바이건싱, 『당으로 간 고구려·백제인(唐代高麗百濟移民硏究-以西安洛陽出土墓志爲中心)』(구난희·김진광 옮김,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9)
- 박한제,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1(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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