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헌성 ()

고대사
인물
삼국시대 고구려 말기와 멸망 이후 고구려 유민으로 당나라와 무주 정권에서 활동한 관료.
이칭
이명
천헌성(泉獻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651년(보장왕 10)
사망 연도
692년
주요 관직
당나라 좌위대장군
내용 요약

연헌성은 삼국시대 고구려 말기와 멸망 이후 고구려 유민으로 당나라와 무주 정권에서 활동한 관료이다. 연헌성은 고구려 말기의 최고 집정자였던 연개소문의 손자이자 연남생의 아들이다. 부친과 함께 당나라에 항복한 이후 당 조정에서 복무하였으며, 주로 군사적인 활동을 하였다. 내준신(來俊臣)의 모함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

정의
삼국시대 고구려 말기와 멸망 이후 고구려 유민으로 당나라와 무주 정권에서 활동한 관료.
가계 및 인적 사항

연헌성(淵獻誠)의 할아버지는 태대막리지(太大莫離支)를 지낸 연개소문(淵蓋蘇文)이며, 아버지는 연개소문의 장남인 연남생(淵男生)이다. 연헌성은 연남생의 주1이며, 기록에 따르면, 풍모와 생김새가 아름답고 말 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였다고 전한다. 집안의 높은 지위에 따라 불과 9세의 나이에 고구려 조정에서 선인(先人)이라는 관등을 받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최고 권력가 집안의 자제였던 연헌성이 10대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에 귀순하게 된 계기는 그의 아버지 형제 간의 분란으로 인한 것이었다.

주요 활동

665년 고구려의 최고 집정자였던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장남이었던 연남생이 그 지위를 대신하여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다. 연남생은 집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수도의 일을 두 동생인 연남건연남산에게 일임하고 고구려의 여러 지역을 순방하러 떠났다. 이때 연남생의 아들인 연헌성도 아버지를 따라 지방 순행길에 동행하였다. 그러나 연남생의 두 동생은 자신들이 권력을 장악하고는 연남생의 귀환을 가로막아 평양성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 연헌성의 나이는 불과 16세였다.

졸지에 권력에서 밀려난 연남생은 급히 국내성(國內城)으로 달아나 동생들에게 대항하였는데, 666년에 아들인 연헌성을 당으로 보내 자신의 투항 의사를 재차 밝히며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 당나라 황제 고종(高宗)은 연헌성을 종3품의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에 임명하여 돌려보냈고, 그해 6월에 당의 장수 계필하력(契苾何力)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연남생과 연헌성 부자를 데리고 당나라로 들어갔다.

679년에 아버지 연남생이 사망하였지만, 연헌성은 계속해서 당 조정에서 활동하였으며, 주로 군사적인 활동을 하였다는 기록이 많이 보인다. 679년에는 아버지 상중이었음에도 정양군토반대사(定襄軍討叛大使)에 임명되어 돌궐(突厥)을 토벌하는 작전에 투입되었으며, 686년에는 신무군대총관(神武軍大總管)에 임명되어 이민족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이끌고 군사 원정에 나서기도 하였다. 또 688년에는 용수도대총관(龍水道大總管)에 임명되어 이정(李貞)의 반란을 토벌하는 데 앞장섰다.

연헌성은 이러한 공로로 벼슬이 차례로 오르면서 690년에는 궁정 경비와 호위 및 의장(儀仗)을 총괄하는 정3품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에 올랐다. 691년에는 주2가 자신의 공덕을 새겨 낙양(洛陽) 황성 앞 광장에 구리기둥〔天樞〕을 세우는 공사에서 필요한 인력과 물자를 조달하는 일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692년에 주3로 악명을 떨쳤던 내준신(來俊臣)이라는 자가 뇌물을 요구하였을 때 이를 거절한 일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모함을 받아 42세의 나이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가 모함을 받아 죽게 된 것은 당시 당나라의 혼란한 정치적 상황에 기인한 점도 있지만, 그가 본래 고구려 유민 출신이었다는 점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상훈과 추모

연헌성의 사후인 700년에 측천무후가 연헌성의 억울함을 뒤늦게 알고는 우우림위대장군(右羽林衛大將軍)을 추증하였으며, 다시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고 한다. 연헌성은 그의 성씨 '연(淵)'이 당나라의 창시자인 고조 이연(李淵)의 이름과 동일하였기 때문에, 당에 들어간 이후에는 천씨(泉氏)로 성씨를 고쳤다. 이로 인해 그의 사후에 만들어진 묘지명에도 이름이 천헌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묘지명에는 헌성에게 현은(玄隱), 현일(玄逸), 현정(玄靜)이라는 이름의 세 아들이 있었다고 전한다.

참고문헌

원전

『구당서(舊唐書)』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당서(新唐書)』

단행본

권덕영, 『재당 한인 묘지명 연구』 역주편(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21)
바이건싱, 『당으로 간 고구려·백제인(唐代高麗百濟移民硏究-以西安洛陽出土墓志爲中心)』(구난희·김진광 옮김,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9)
박한제,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1(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주석
주1

정실이 낳은 아들.    우리말샘

주2

중국 당나라 고종의 황후(624?~705). 성은 무(武). 이름은 조(曌). 중국 역사에서 유일한 여제(女帝)로 고종을 대신하여 실권을 쥐고, 두 아들을 차례로 제왕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으며, 스스로 제왕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성신 황제(聖神皇帝)라 칭하였다.    우리말샘

주3

매우 모질고 무자비한 관리.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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