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남생 묘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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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말기의 재상이며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맏아들인 남생(男生)의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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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구려 말기의 재상이며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맏아들인 남생(男生)의 묘지.
내용

지석(誌石)의 크기 가로 115㎝, 세로 115㎝. 1923년 중국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베이망(北邙)에서 출토되었다.

명문은 자경(字徑) 1.5㎝의 해서로 1행 47자 전체 46행이다. 별도로 주연(周緣)에 당초문을 새기고 그 중앙에 “大唐故特進泉君墓誌(대당고특진천군묘지)”라는 9자의 전서를 3행으로 새긴 전개(篆蓋)가 있다.

묘지에는 남생의 관직 · 품계 및 그의 조상과 아버지에 관한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종래 『삼국사기』 등의 기록으로 남생이 46세에 죽었음을 알 수는 있었으나 그의 생몰년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묘지의 출토로 말미암아 그의 몰년이 의봉(儀鳳) 4년(679)이며, 이에 따라 그의 출생연도가 고구려 영류왕 17년(634)임이 밝혀졌다. 또한 명문 중에 조로(調露) 원년(679) 12월 26일 묘지를 묻었다고 하였는데, 조로는 당나라 고종의 연호로 그 원년은 의봉 4년과 같은해인 을묘년(乙卯年)이다.

묘지의 명문을 지은 이는 왕덕진(王德眞)이며, 글씨는 구양통(歐陽通)이 썼다. 특히, 구양통은 초당(初唐)의 유명한 서예가인 구양순(歐陽詢)의 아들로, 아버지의 서풍을 잘 본받고 있다.

1923년 뤄양 베이망에서 이 묘지와 전후하여 출토된 백제부여융묘지(百濟扶餘隆墓誌) · 고구려고자묘지(高句麗高慈墓誌) · 고구려천남산묘지(高句麗泉男産墓誌)와 함께 삼국통일기를 즈음하여 당나라에서 활약한 백제 · 고구려 유민들의 사적을 살필 수 있는 사료로 문헌사료를 보충하여주는 중요한 석문(石文)이다.

참고문헌

『한국금석문추보(韓國金石文追補)』(이난영, 아세아문화사, 1976)
『朝鮮金石攷』(葛城末冶, 東京 國書刊行會,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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