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읍성지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 수축에 관한 내용으로 『동국여지승람』 읍성 조에 나타나고 있다. 이첨(李詹)의 기록에 의하면, “원수 박위(朴葳)가 우왕 13년(1387) 8월 19일 동래군성의 축성에 착수하여 한 달 이상 걸려서 완공하였는데 석축으로 둘레가 3,090척, 높이 13척으로 우물이 6개가 있었다.”라고 되어 있다.
또한 『경상도속찬지리지』에 1446년(세종 28) 현령 김시로가 둘레 3,092척, 높이 15척으로 석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원수 박위가 우왕 13년(1387) 8월 19일 동래읍성의 축성에 착수하여 한 달 이상 걸려서 완공하였는데 석축으로 둘레가 3,090척, 높이 13척으로 우물이 6개가 있었다.”라고 하였다.
동래읍성지에서 임진왜란 당시 부사 송상현을 비롯한 군민이 왜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이로 인해 동래읍성지가 무너지게 되었는데, 그 이후 보수되지 않고 방치되었다가 1731년(영조 7)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동래부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마안산 능선 자락과 망월산 능선 그리고 조선 전기의 동래읍성지 남서 벽을 이은 둘레 17,291척, 높이 17척의 읍성을 쌓았다. 이후 1871년(고종 7)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이 포루를 다수 설치하고 성벽 몸체를 재수축하였다.
부산광역시에서는 구릉에 현존하는 성지(城址)를 중심으로 훼손 · 방치되었거나 남아 있는 성터가 확인되는 곳을 대대적으로 보수 및 복원하는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동래읍성지에 대한 복원 · 보수는 1979년에 동장대, 서장대를 중심으로 한 복원을 시작으로 북장대, 북문지, 인생문, 옹성, 후기 동래읍성지의 성벽 몸체 약 930m와 치성 7개소, 여장 등이 복원되었다.
동래읍성지는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 명장동, 명륜동, 복산동에 걸쳐 위치하고 있으며, 평면 형태는 타원형에 가까운 평산성이다. 북쪽과 동쪽은 산에 둘러져 있고 남쪽과 서쪽이 열려 있어 남쪽이 정문에 해당된다. 문은 서문, 암문, 북문, 동문, 인생문의 6개가 있다. 각 문에는 문루(門樓)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현재는 북문과 인생문이 복원되어 있다. 또한 성지가 지나가면서 조망하기 좋은 구릉의 정상부에 복원된 모습으로 동, 서, 북장대가 설치되어 있다.
현재 동장대가 있는 동래고등학교 뒤쪽의 망월산에서 대포산을 거쳐, 서장대가 있는 동래향교 뒷산까지 구릉지의 정선부(頂線部)를 중심으로 석축의 흔적이 잘 남아 있다. 서문에서 남문으로 연결되는 평지성에 해당하는 성벽은 일제강점기 때 이 지역의 시가지 건설 계획으로 인해 모두 철거되어 당시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성 내부의 건물로는 객사를 중심으로 동헌, 누정, 향청, 무청, 창고 등의 건물과 누각이 배치되어 있으며, 동헌과 객사를 중심으로 연결된 도로가 ‘+’ 모양으로 조성되어 있다. 남문과 서문 연결 도로가 주도로로, 서문으로 연결된 도로는 온천, 부곡동으로 이어지면서 조선 영남로로 이어지고 있다.
전기 동래읍성지는 성벽석이 대부분 멸실되어 잔존하지 않았으나, 성벽의 기초를 다지기 위한 기초 다짐석과 그 상부의 지대석 및 기단석은 양호하게 남아 있어 성곽의 윤곽을 확인할 수 있다. 축조 수법은 먼저 풍화암반토를 니은(ㄴ) 모양으로 정지하여 외벽 쪽에서 인두대 크기의 적심석을 5~6단 정도 축조하고, 그 안쪽으로는 약 70cm 높이까지 돌로 채웠는데, 외벽의 적심석 최상단 위에 너비 40cm 내외, 두께 20cm 내외의 판석을 지대석으로 놓고, 두께 35cm 내외의 대형의 판석을 기단석으로 삼았다. 내벽은 외벽으로부터 600cm 안쪽에서 확인되며 3035cm×3540cm크기 삼각형의 석재를 넣어 3~4단 정도 쌓았다. 그 바깥쪽으로는 황갈색 마사토와 갈색 점토가 덧대어져 있어 수축 또는 증축된 흔적으로 확인된다.
전기 동래읍성지의 유물로서는 성벽석 사이에서 주로 출토된 분청사기편 및 백자편, 뻘층에서 수습된 백자 및 도기편, 기와편 등이 발견되었다. 특히 분청사기 인화문 대접편 중에서 경(慶), 고(庫) 등의 명문이 확인된다. 해자에서는 해자 호안 석축, 가교, 목익 등의 시설물과 갑옷, 투구, 창검 등의 도검류, 화살촉, 깍지 등이 확인되었다. 이외에 발굴된 인골 중 도검류 등에 훼손된 두개골 등이 확인되어 임진왜란 당시의 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현재는 동래 수안역사에 이전, 전시되어 있다.
후기 동래읍성지는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 명장동, 명륜동, 복산동에 걸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과 동쪽은 산에 둘러져 있고 남쪽과 서쪽이 평지에 해당된다. 문은 서문, 암문, 북문, 동문, 인생문 6개소가 있다. 읍성 둘레 17,291척, 여장 1,318타, 높이 17척으로 성내에는 10개 우물과 1개 못이 있고, 수성청을 두었다. 남문에는 익성(翼城)을 두었고, 나머지는 옹성을 설치하였다.
전체 성벽 2.7km 중 남쪽 부분 1.3km는 시가지화하여 없어졌으며, 현존 성곽은 석성으로 높이 1.53.0m인데 상부 폭은 2.4m 내외이다. 축조 수법은 자연 암반인 기반암층 위에 소할석과 암갈색 사질 점토를 다짐하여 수평을 맞춘 후 수직으로 외벽석을 축조하였다. 외벽에서 성벽 몸체 내벽 쪽으로 약 1m 정도까지 20cm 내외를 할석으로 뒤채움 하였다. 외벽 바깥쪽은 510cm 정도 두께의 사질층과 사질 점토층을 교차하여 기단석까지 덧대어 성벽 몸체 기단부를 보강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석은 3~5단 정도이고 3단까지는 경사에 따라 세워쌓기를 하였으며 그 위로는 눕혀쌓기를 하였다. 성벽 몸체 외벽에서는 축조 구분점이 확인되며 각 구간 간격은 4m 정도이다.
외벽 축조는 경사면을 따라 지대석을 놓고 수평을 맞추어 기단석을 놓은 뒤 그 위로 성석을 축조하고 있으며 성석과 성석 사이에는 소할석, 황갈색 사질토와 강회를 발라 마무리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외에도 성벽 몸체 외벽 축조 시 생토층 위에 암갈색 점질토를 정지한 후 바로 대형의 장방형 석재를 기단부로 축조한 경우도 확인되고 있어 구간별로 축조 수법에 일정한 차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성벽 몸체 외벽 기단석에서는 각자(刻字) 된 명문이 확인되었다. 그 명문 내용 중, “북소구(北所九) 패장(牌將), 출신(出身) 서후봉(徐後逢), 석수승(石手僧) 00명(明), 00 군경주(軍慶州), 사청도(寺淸道)” 등이 있는데, 여기에서 확인되는 서후봉(徐後逢)은 『내주축성비(萊州築城碑)』, 『동래부축성담록(東萊府築城膽錄)』에도 그 이름이 확인되고 있다.
동래구청 신청사 부지에서 확인된 성벽 몸체 외벽은 2단 정도 잔존해 있고, 벽석 길이는 40150cm, 너비는 40130cm가량인데, 다듬은 장방형의 석재를 가로로 평평하게 쌓고 있다. 성석 사이는 맞물려서 틈새를 없게 하였다. 성벽 몸체는 기반토가 니질토로 연약 지반 강화를 위해 나무 지정을 박고, 흑갈색 니질토로 성토하여 대지를 조성한 후 그 위에 점토와 황갈색 사질토, 할석을 포함한 암갈색 사질토 등을 교대로 성토하여 성벽 몸체를 축조하였다. 그 후 외벽 성석과 적심석을 채울 공간을 니은(ㄴ) 모양으로 절개한 후, 성벽 외벽석과 약 1~1.5m 가량을 할석으로 적심을 채운 뒤쪽에 흑갈색 니질 점토와 식물 등을 이용한 부엽공법(敷葉工法)으로 메웠다.
후기 동래읍성지의 해자 호안 석축 내측 벽 및 해자 내외에서 직경 20cm 내외 목주혈과 목익, 차수벽으로 추정되는 석열이 나란히 확인되며 해자를 넘나들 수 있는 목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기 동래읍성지에서는 다량의 기와편이 수습되었다. 이 기와편의 타날 문양은 창해파문이 압도적으로 많이며 선문, 집선문, 복합문, 무문이 일부 확인된다. 명문와는 ‘기사삼월명(己巳三月名) 칠십명(七十名) 신미오월명(辛未五月名), 0와(瓦)’ 성명이 출토되었다. 그 외 백자편이 확인되고 있다.
최근까지 이루어진 전기 동래읍성지의 고고학적 조사 결과, 1446년(세종 28)에 축조된 동래현성은 규모와 축조 수법에 있어 조선 전기 연해읍성의 성곽 축조 방식을 충실하게 이행한 것으로 파악해 볼 수 있다. 반면에 1731년에 축조된 후기 동래읍성지는 구조와 규모, 성벽 몸체 축조 수법, 부대 시설 설치 유무 등에서 전기 동래읍성지를 포함하여 조선 전기 연해읍성과는 다른 성곽 축조 방식이 확인되고 있다.
이것은 17세기 이후 성벽 몸체 축조 경향이 군사적, 행정적 상위 단위인 부(府) · 목(牧) 등에 확산이 일부 이루어졌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경향의 적용은 일부에 한정적이었다. 따라서 후기 동래읍성지는 조선 전기 읍성과 비교하여 구조 및 규모, 부대 시설 등에서 그 유형을 달리하는 것이 확인되고 있어 16세기 이후 조선 성곽 축조 신경향이 도입된 지역 거점 성곽으로 파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