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읍성지(靈山邑城址)는 조선 성종 8년(1477)에 축조된 읍성으로 평산성이다. 읍성 북쪽의 정상부에는 과거 신라 태자묘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지금도 태자각이 남아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읍성의 둘레는 3,810척, 체성의 높이 12척 5촌으로 성종 8년(1477)에 시축하였고 이후에 피폐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사 결과 성의 둘레는 약 1,465m, 높이는 약 4m, 너비는 6.6m~7.1m이다. 성의 부대시설로 동 · 서 · 남문지 3개소, 치성 6개소, 수구가 확인되었다.
영산읍성(靈山邑城)에 대한 조사는 5차례 걸쳐 이루어졌다. 1998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한 결과 영산읍성은 영취산 남쪽 기슭에서 평지로 연결되는 지점에 남에서 북으로 축조된 주형 평면 형태의 평산성임이 밝혀졌다. 성의 규모는 길이 1,465m, 높이 약 4m이며, 경사지 구간의 잔존 너비는 6.6m, 평지 구간의 잔존 너비는 7.1m이다. 성의 부대시설로 동 · 서 · 남쪽에 문지 3개소, 치성(雉城) 6개소, 수구(水口)를 확인하였다.
이후 2005년 경남대학교 박물관의 조사를 통해 읍성의 잔존 상태뿐만 아니라 읍성 내부의 주요 건물과 옛길도 조사되었다. 그 결과 동헌, 내아(內衙), 책실(冊室), 향청 등 부속 건물이 1900년대 초까지 성내에 잔존하였으며, 이 중 문호장사당은 지금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2011년, 2014년 조사에서는 영산읍성의 축성 기법과 훼손 현황을 기록하였으며, 관련된 고문헌 및 기초 자료를 정리하였다. 또한 그리드 시스템을 활용해 성곽 구간을 코드화한 뒤 3D 스캔을 통해 정밀 실측 조사도 진행하였다. 또한 성내 시설물로 유다리터, 동헌, 내아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구간, 향청, 객사, 사창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구간 등에 대한 위치 조사가 이루어졌다. 현재 남아있는 태자각, 책식, 문호장사당 등의 건물은 정밀 실측하여 보존 자료로 남겼다.
이외에도 2015년과 2018년에 창원대학교 박물관과 재단법인 한화문물연구원이 각각 역사문화자원 발굴 학술 용역과 국가사적 지정을 위한 기초 자료 연구 용역을 진행하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영산읍성에 대해 “읍성의 둘레는 3,810척이고 체성의 높이는 12척 5촌으로 성종 8년(1477)에 시축하였으나 이후에 피폐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영산읍성의 초축과 관련하여 성종 8년(1477) 윤2월 11일 기유조에 '하삼도 축성 등을 조정에서 논의하였는데 그 내용 중에 감사로 하여금 연변과 내지의 여러 고을에서 성을 쌓을 만한 곳을 살피게 한 후 영산 이하 여러 고을에 먼저 쌓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영산읍지』에는 "읍성의 둘레는 3,810척이고 체성부의 높이는 12척 5촌"으로 나오는데, 영산읍성의 실제 길이는 3,810척의 환산치보다 조금 긴 1,465m 정도이고 높이는 4m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성종 8년(1477)에 축조 논의와 함께 영산읍성이 시축되었다. 인조 9년(1631)에는 창녕현이 영산현에 합쳐졌다가 인조 15년(1637)에 창녕현으로 복구되었다.
영산읍성의 체성(体城)은 태자각이 있는 고지(故址) 구간과 수구가 있는 구간에서는 너비 660cm 정도였으며, 평지에서는 710cm 규모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체성을 쌓은 수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산지에 해당하는 고지에는 구릉지 사면의 생토층을 절토(切土)하여 정지(整地)한 다음 자갈을 깔아 기반을 다지고, 그 위에 두께 20~30cm 정도의 장대석을 일렬로 배치하여 지대석으로 삼았다. 그 위에 직경 100cm 정도의 자연대석을 20cm 가량 안쪽으로 세워 기단석(基壇石)을 삼는다. 다시 그 위에는 장대석을 적심(積心) 쪽으로 걸쳐 쌓고 그 위로 기단석과 같은 대석을 세워 쌓는 수법을 반복하였다. 이와 같이 세워쌓기와 눕혀쌓기를 반복하는 수법은 체성의 상부로 갈수록 점차 보이지 않는다. 평지의 경우에는 생토면을 깎아 땅을 고른 후 그 위에 지대석을 깔고 앞의 경우와 동일한 방법으로 기단석과 상단부를 축성하였다.
영산읍성에는 총 3개소 성문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사 당시 남문지는 옹성(甕城) 외벽을 민가에서 담장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높이 약 2m, 길이 약 20m의 옹성 외벽이 잔존하고 있었다.
영산읍성의 치성(雉城)은 6개소이다. 태자각 동쪽의 치성은 동쪽과 남북쪽으로 각각 720cm 길이의 네모꼴이며, 북쪽 치성 끝부분의 동서축 길이는 820cm로 남쪽의 치성보다 약간 안쪽으로 들여서 축조되었다. 치성은 체성과 동시에 축조되었다. 치성의 지대석은 판상의 장대석을 생토층에 길게 눕혀 쌓고, 그 위에 20cm 가량 안쪽 바닥면에 자연대석의 기단석을 수직으로 세워 쌓았다. 체성 내부의 적심은 할석(割石)과 잡석(雜石)으로 정연하게 메웠다. 태자각 서쪽의 치성은 남북 길이 930cm, 동서 길이 중 남쪽 측벽의 길이가 600cm, 북쪽 측벽의 기이가 670cm 정도의 장방형(長方形)으로 확인되었다. 치성을 축조한 수법은 경사진 지형을 평탄하게 다듬은 뒤 두께 20~30cm 가량 되는 판상의 지대석을 전체적으로 깔고, 그 위에 길이 100cm 가량의 자연대석으로 기단석을 세우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이는 인접한 동벽의 체성을 축조한 수법과 동일하다. 치성 외벽의 잔존 최고 높이는 120cm 가량이며, 치성에 연결된 체성의 잔존 높이는 150cm 정도, 잔존 길이는 20m 가량 된다.
수구는 읍성 정상부에서 서쪽 골짜기로 흐르는 소하천이 성내로 유입되는 지점에 설치되어 있다. 수구의 내벽부는 자연 암반 위에 판석을 수평으로 깔고 양측으로 장대석을 3단 정도 쌓아 장방형으로 수구부를 만들었다. 수구부 가운데에 폭 60cm 가량의 판석으로 기둥을 세운 뒤 그 위를 50cm 두께의 판석 1매로 덮었다. 가운데 기둥에는 2개의 구멍이 있다. 수구 전체 너비는 가로 165cm, 세로 100cm이고, 북쪽은 가로 55cm, 높이 100cm, 남쪽은 가로 50cm, 높이 100cm로 이루어져 있다. 외벽 입수구의 구조는 내벽부 출수구의 구조와 유사하다. 수구 위로 두께 20~30cm 가량의 판석을 눕힌 후 그 위에 20cm 가량 안쪽으로 판상의 석재를 세워 쌓았다. 수구의 출수구는 성내를 돌아 동남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영산읍성에서 출토된 유물은 토기편, 자기편, 옹기편 등이다. 출토된 유물 중 영조 28년(1752)에 어영청에서 주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상평통보 1점이 확인되었다.
영산읍성은 조선 전기에 축조된 내지 읍성으로 내륙의 상경(上京) 거점 중 하나였다. 특히 영산읍성은 주형 평면 형태, 계단식 체성 축조 수법, 사직선기단 축조 방식 등 고고학적 가치가 있는 성의 구조와 축조 수법이 확인된다. 창녕군 내에 유일하게 잔존하는 성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