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성은 계룡산 남쪽 산록완사면에 동에서 서로 배치된 평면 주형의 평산성이다. 한국전쟁 당시 UN군 포로수용소가 이곳에 설치되었으며, 이때 성이 훼손되었다.
1991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북벽과 서벽 일부, 2004년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가 동문지와 동벽 해자의 일부를 조사하였다. 북벽과 서벽 및 동벽 일부는 복원하여 정비되었다. 성의 내부에 거제시청이 서벽의 내벽 방향으로 동쪽을 바라보며 있다.
성벽은 표토(表土)를 제거하고 성 안쪽에서 외벽 쪽으로 ‘ㄴ’자로 땅을 고른 후, 그 위에 10cm 내외의 점토를 다져 할석(割石)과 자갈로 체성(体城)의 기단부를 구축하였다. 그 위에 두께 20cm 내외의 장방형(長方形) 대석(臺石)을 지대석(址臺石)으로 설치하고, 60~130 × 30~70cm 정도의 자연 대석을 약 15cm 정도 물려서 세워 놓았다.
문지는 동, 서, 남문이 있다. 사방의 체성을 모두 잘라 바깥쪽에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둘러 만들었다. 고현성 동문지의 옹성 둘레는 47m이고, 성벽의 너비는 7m, 동문지의 너비는 3.2m이다. 북문지의 너비는 4.15m로 확인되었다. 두 문지는 체성과 동시에 축조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해자는 동벽 체성의 바깥에서 확인되었다. 해자의 규모는 길이 54m, 상부 너비 6.4m, 하부 너비 4.5m, 최대 깊이 2.9m이다. 현재 남아있는 동벽 해자의 길이는 약 185m이다. 해자는 동문지의 옹성을 따라 S자 형태의 모양으로 만들어졌으며, 석축교가 확인된다. 방어를 위한 목익(木杙)이 설치되어 있다.
고현성 터에서는 조선 전기에서 후기까지의 기와류와 자기류가 출토되었다. 출토된 기와루와 자기류는 분청사기, 회청사기, 백자 등 생활 자기류인 접시와 사발이 대부분이다. 기와는 집선계 직선형 사선문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부분적으로 집선계 사선문, 복합문, 수직선조문, 호상문이 새겨진 것들이 출토되고 있다. 또한 해자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호상문이 새겨진 명문 암막새에는 “도광”과 “동치 15年”이라는 명문이 확인된다. 이는 건물의 중창과 관련된 기록인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 연호는 청나라 말기에 사용된 것으로 고현성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이외 목기가 두 점 출토되었다.
거제도는 일찍부터 남해를 거쳐 서쪽으로 진출하는 해로상의 중요한 길목으로 인식되었다. 남해안 지역 중 특히 도서 지역에서 왜구를 방어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읍성이 축조된 것이다. 따라서 고현성은 조선 전기 연해 읍성의 구조와 축조 수법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성곽 축조 수법의 변천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