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부터 2012년 사이에 기장읍성(機張邑城)의 북벽과 동벽 일부, 적을 방어하고 공격할 수 있는 옹성, 적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조사를 바탕으로 기장읍성은 경사면에 지대석과 기단석을 그대로 쌓는 '사직선기단(斜直線基壇) 축조 방식'을 사용한 것이 밝혀졌다. 또한 성벽의 몸체(體城壁)에 가늘고 긴 직사각형 모양의 면석을 사용한 것이 밝혀졌다. 이러한 건축 방식은 고려시대의 성곽 축조 수법과 조선시대 연해읍성(沿海邑城)의 축조 수법을 혼용한 것이다. 2012년 객사와 동헌 및 북문지와 동문지 사이의 성벽에 대한 조사가 추가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복원된 장관청과 성내 관아 건물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도 이루어졌다. 2017년에서 2021년 사이에는 남문의 옹성, 남벽과 서벽의 체성, 남동 성우, 남벽과 서벽의 해자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를 실시하여 읍성의 전체적인 모습을 확인하였다.
성벽의 몸체는 사직선 기단과 수평 기단을 혼용해 만들었다. 외벽은 장대석으로 세워쌓기와 눕혀쌓기를 교대로 했다. 동문지와 그 주변 그리고 서벽의 체성은 비교적 좋은 상태로 남아 있다. 동문지의 옹성은 반원형의 편문식으로 성벽에 덧대어 만들었다. 옹성 내벽의 직경은 약 14m, 둘레 약 23.5m, 높이는 2.30.3m이다. 남아 있는외벽의 둘레는 약 50m, 폭은 6.57m이다. 적대는 동문지에서부터 남쪽으로 약 50m 떨어진 곳에서 확인된다. 북측 벽에 이어진 적대의 일부분은 복원되어 있다. 적대의 규모는 길이 8.9m, 너비 7.3m이다. 해자는 남벽과 서벽, 남동벽으로부터 9∼12.6m, 7.8∼10m, 8m의 이격 거리가 확인되며, 남벽 해자의 너비는 5.5~6m 내외, 남아 있는 해자의 깊이는 0.6~1.5m 내외로 확인된다.
읍성 내의 관아 건물로는 동헌 · 기장 향교(향사당) · 객사 · 사창 · 인리청 · 군성관 · 면금루 · 척서루 · 식파루 · 장관청 · 영방 · 군기고 등이 있었으며, 성문 밖에는 망풍정 · 공신루 · 관덕정 · 영고 · 마지 등이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죽성리 왜성(기장 죽성리성)을 쌓으면서 기장읍성의 돌을 반 이상 뽑아 갔다는 기록이 있다. 이 시기에 기장읍성의 성벽이 상당 부분 무너졌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와 8·15광복 이후 성의 내부에 학교와 주택들이 들어서면서 성벽은 더욱 심하게 훼손되었다. 다만 일부 양호한 구간이 있고 민가의 담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부분도 있다. 성의 외부에도 곳곳에 택지가 조성되고 있다.
기장읍성은 조선시대 읍성의 축조 기법이 정립되기 전에 만들어진 성이다. 그래서 이 읍성은 고려시대 성곽 축조 수법과 조선시대 읍성 축조 수법이 혼합되어 있다. 읍성 축조 수법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장읍성은 읍성 축조사에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