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경상좌도병영성에 대한 발굴 조사는 1985년 병영성 동남쪽 160m 구간에서 처음 실시되었다. 이 조사에서 병영성 성벽 몸체, 치성, 해자의 위치와 구조, 축조 수법 등이 밝혀졌다. 1999년 북문지 일대에 대한 조사에서 협축식 구조로 된 옹성과 북문지 관련 시설, 그 주변 성벽 몸체 및 해자 일부가 확인되었다. 2002∽2003년 성벽 몸체와 해자를 조사하여 성벽 몸체의 축조 수법을 파악하였다. 2010년 이후 울산 좌도병영성에 대한 종합 정비 계획에 따라 북문지와 동문지 사이에서 성벽 몸체, 치성 3개소, 해자 등을 확인하였다. 서문지 일대에 대한 조사 결과 성벽 몸체, 서문지 옹성과 문루 건물지, 치성 3개소, 해자 등을 확인하였다. 성내 건물지는 병영성 객사 선위각(宣威閣)의 정문인 진해루(鎭海樓)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확인되었고, 병영성 관아 건물지로 추정되는 정면 5칸, 옆면 5칸 규모의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울산은 고려 초기 박윤웅이 태조를 도와 고려를 일으킨 공을 인정받아 흥려부(興麗府)가 되었다가 성종 때 공화현(恭化縣), 울주군(蔚州郡)을 거쳐 울산군(蔚山郡)으로 개칭되었다. 울산 병영성이라는 이름은 조선 초기 이곳에 경상좌도병마절제사영(慶尙左道兵馬節制使營)이 자리한 데서 생긴 것이며, 과거에 병영면, 병영동 등의 지명으로 사용되어 왔다. 『동국여지승람』 울산군 건치연혁 조에 "…太宗十三年罷鎭改今名 爲知郡事 十五年以郡治爲左道兵馬節制使營…"이라 하여 1415년(태종 15)에 처음 병마절제사영(兵馬節制使營)이 설치(設置)되고 이곳을 곧장 병영이라고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동서(同書) 관방 조에는 "左道兵馬節度使營 在戒邊城北 卽郡舊治 石城周三千七百二十三尺高十二尺 內有井七渠 有軍 倉…營舊在慶州東南二十餘里 太宗條移于蔚山治所 卽此"라고 하여 규모와 설치 시기를 기록하고 있다. 이곳은 울산광역시 중심부에서 동북 측으로 약간 떨어진 곳으로 울산과 경주로 통하는 7번 국도와 동해 남부선 철도가 모두 성 밑을 지나고 있다. 현재 병영 성지가 외관상 평야 중에 우뚝 솟은 독립 구릉처럼 보이지만 조선 초기 이곳에 병영이 설치될 당시만 하더라도 지금의 주위 평야는 모두 남해의 해수가 가득 찬 바다였고, 특히 성 동쪽에 연접해서 흐르고 있는 동천을 통해서는 성 북문 아래까지 배가 드나들 수 있었다.
울산 병영성 지역에 군사 업무를 병행하게 된 것은 고려시대부터로, 『고려사』 울산 조에 1018년(현종 9) "방어사를 설치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울산읍지』 등에 1397년(조선 태조 6) 진(鎭)이 병설되었다가 1413년(태종 13)에 경주로 진이 옮겨지고 없어졌다. 그 뒤인 1415년(태종 15), 경주에 있던 좌도병마도절제사영이 다시 옮겨왔으며, 1426년(세종 8)에는 병영을 창원으로 옮기고 진을 대신 설치하였다. 이때 진은 병영성에 그대로 두고 군치소는 서쪽 태화 강변으로 이동하여 분리되었다. 1437년(세종 19) 창원에 있던 병영을 이곳으로 다시 옮긴 뒤의 기록은 확실치 않다. 이후 1584년(선조 17)에 다시 병영이 설치되었다. 임진왜란 시 성이 함락된 후 왜군이 울산 왜성 축조를 위해 병영성 성석 대부분을 반출하여 갔다고 한다. 한편 『여지도서』에는 주요 건물의 배치와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이후 『영남영지』에 "성은 돌로 쌓았고 둘레는 1836보, 높이 12척, 타(駝)는 851첩(堞)이다. 동, 서, 북쪽 문루는 각 3칸이며, 남쪽 문루는 3칸 2층이다. 옹성은 두 개인데 서문 옹성, 둘레는 47보, 높이는 16척, 북문 옹성 둘레 45보, 높이 16척이다. 초루는 8개이며 각 2칸이나 쓰러져 무너졌다. 남쪽 외성은 돌로 쌓았고 둘레는 180보, 높이는 15척이다."라고 하였다. 1860년 병사 이원희(李元熙)가 기지 남쪽 변두리가 낮아서 새로 지었다. 외남문은 병사 구주원(具胄元)이 새로 지었다. 이를 통해 조선 후기에는 외성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곽은 자연 지형의 능선을 따라 축조되어 타원형을 이루는 포곡식 석축성으로 북쪽과 서쪽 지역이 높고 남쪽으로 가면서 낮아지며 동쪽은 동천과 접해 급사면을 이룬다. 성의 사방에 성문을 설치하였으며 성문을 연결하는 십자상 도로가 조성되었으며 남문 밖 도로는 울산 읍성으로 가는 도로와 연결되어 있다. 객사와 동헌을 비롯한 각종 공해 시설은 성 내부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병영 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1450년(문종 1) 9월 기록에 울산 내상성은 주회(周回) 3,732척, 고(高) 8척, 여장 3척, 적대(敵臺) 21개 중 3개가 미축, 옹성 있는 문이 4개, 여장 908개, 성내 우물 11개, 천(川) 3개소, 해자 혹착, 혹미착이라 하였다. 잔존 성 둘레는 2,120m, 성벽 몸체 너비 약 7m이나 일부에서는 5.8m로 확인된다. 울산 경상좌도병영성 성벽 몸체 축조 수법은 구릉 정상에 해당하는 지점을 내벽 끝으로 삼고, 외벽 끝은 비스듬한 경사면을 절개하여 평탄하게 만든 다음 지대석을 배치한 뒤 먼저 내탁(內托)하였다.
외벽은 90cm×150cm×100cm의 4각으로 가공된 듯한 납작한 장대석을 생토층 위에 점토와 자갈돌을 섞어 단단하게 다진 뒤 올려놓아 지대석으로 삼고 그 위에 기단석인 자연 대석을 내측으로 50cm 정도 들여서 놓아 마치 계단처럼 보인다. 그리고 내벽은 외벽처럼 자연 대석을 사용하지 않고 일반 담장같이 막돌을 이용하여 지대석 없이 지면에 수직되게 가지런히 쌓아 올린 형태였다. 형식상 내벽이 쌓여지는 단계부터 내탁에서 협축으로 바뀌어지면서 축조된 셈이다. 이렇게 축조된 내외 벽면은 폭이 7m이고 그 사이 적심석은 막돌을 이용하였다. 이때 사용된 적심석도 내벽에 사용된 막돌과 동일한 것이었고 내외벽에 가까운 적심은 열을 지어 배치하였으므로 바깥 성벽 몸체가 무너져도 적심까지 손상되지 않도록 계단상을 띄고 있다. 기단부만 남아 있는 사방 8m 규모의 평면 정방형의 치성이 확인되는데 체성에 덧대어져 축조되었다. 동문지와 북문지 사이에 약 90m 간격으로 잔존하고 있다. 해자는 성벽 몸체 외벽에 대략 10m 내외로 이격하여 바깥으로 생토층을 단면 'U'자상으로 구락한 것으로 너비 8m, 깊이 2m 정도가 잔존한다. 동문지 초축 문지는 정면 420cm, 측면240cm, 협칸 270cm인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 건물지이다.
울산 경상좌도병영성은 울산만을 통해 서쪽으로 언양이나 북쪽 경주를 거쳐 대구와 경북 내륙 지방으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하는 중요 지점에 위치하여 신라,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왜구 침입을 방어한 군사 요충지로서의 역할이 강조되었으며 특히 조선시대에는 경상좌도병마절제사영이 설치된 중요한 성곽이다. 현재 종합 정비 계획에 따라 연차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