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중요무형문화재(현, 중요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원래 정월 대보름날에 벌여온 놀이였는데, 오늘날은 양력 3월 1일에 행한다. 양편이 패를 갈라 나무로 엮어 소를 어깨에 메고 서로 맞부딪쳐서 승패를 가르는 남성집단놀이이다.
‘나무쇠싸움’ · ‘쇠머리댄다’ · ‘목우붙이기’, 또는 ‘목우전(木牛戰)’이라고도 한다. 이 가운데 ‘나무쇠싸움’이라는 명칭이 현지 주민들에 의하여 가장 흔하게 사용되고 있으나, 1969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할 때 ‘영산쇠머리대기’로 명명하였다.
이 놀이의 유래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은 없으며, 다만 현지주민들 사이에 풍수설과 관련된 두 가지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① 현재의 시장터에 있었던 동헌(東軒)의 좌향이 소자리[丑座]여서 지살(地煞)이 끼어 있었기 때문에 이 지살을 풀어주기 위하여 벌였다는 것이고, ② 영산읍 북쪽에 위치한 영취산(靈鷲山)과 함박산의 산세가 읍을 가운데 두고 소가 서로 마주서서 겨루는 형상을 취하고 있어, 이 산살(山煞)을 풀어주어야 불행을 막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 놀이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나무 쇠는 길이 약 5m, 지름 20㎝쯤 되는 소나무 20여 개로 만든다. 한 달 전부터 나무를 구하러 산으로 돌아다니며 적당한 재목이 눈에 띄면, 먼저 금줄을 쳐서 다른 사람이 베어가지 못하도록 한 다음, 날을 가려 산신제를 지내고 나서 베어 운반한다. 나무 쇠는 몸과 머리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몸은 여섯 개의 나무를 가로세로로 얽어서 만드는데, 나무와 나무 사이의 간격은 사람이 들어서서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잡는다(50×50㎝). 그리고 이에 수직으로 서너 개의 나무를 정삼각형이 되도록 위는 모아서 묶고, 아래는 몸 좌우 양쪽에 닿도록 벌려 세우며, 몸과 머리가 닿는 부분에는 굵은 새끼를 십여 겹이 되도록 감아둔다.
이 부분에 새끼줄을 많이 감는 것은 머리와 몸을 튼튼하게 고정시키려는 목적 외에 나무 쇠가 맞부딪칠 때에 생기는 충격을 감소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머리의 상부에는 두꺼운 종이를 씌우고 거기에 소의 눈과 코, 입 따위를 그려서 형상을 꾸미며, 이 머리와 몸 사이에는 다시 기둥을 걸어서 서로 충돌하였을 때 머리가 뒤로 꺾어지지 않도록 한다.
나무쇠가 다 제작된 뒤에는 이 소의 몸을 넘으면 아들을 못 낳은 부인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속신이 있기 때문에, 자기편의 소를 여자가 넘으면 싸움에 진다고 해서 밤낮으로 사람들이 지킨다. 이러한 전승은 영산줄다리기의 줄의 경우와 같다.
나무쇠싸움을 시작할 때, 주민들은 줄다리기의 경우와 같이 동부와 서부 두 편으로 나뉜다. 동서 경계는 옛 성을 기준으로 삼아 성 안쪽의 성내리와 교리는 동부, 성밖의 서리와 동리는 서부가 되며, 읍 외의 주민들은 구마고속도로를 중심으로 마을의 위치에 따라 동서 양편으로 나뉜다.
줄다리기의 경우처럼 나무쇠싸움에 수천 명의 응원군이 몰려드는 것은 이처럼 인근 주민까지 합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부는 남성을, 서부는 여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가 뜨는 쪽의 동부는 ‘양(陽)’이고 해가 지는 쪽의 서부는 ‘음(陰)’이라고 보아서, 여성인 서부 쪽이 이겨야 농사가 잘 되고 마을이 태평하리라고 믿는 것도 줄다리기의 경우와 같다. 동서 양군에는 대장 · 중장 · 소장이 있어 싸움을 지휘한다.
이들은 모두 장년들로서 마을사람들의 신망을 받아야 하지만, 이밖에 나무쇠싸움에 드는 경비의 일부를 부담할 수 있는 경제적인 여력도 있어야 한다.
한편, 이 싸움의 지휘자로 선출되는 것은 본인에게 큰 영예일 뿐 아니라 본인이 평소에 바라던 바를 성취할 수 있으리라고 믿어, 읍내사람은 물론 외지사람들 가운데에서 지원자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 장군들은 1910년경부터 1960년대까지는 한말의 서구식 군복을 입었으나, 지금은 다시 조선시대의 구군복(具軍服) 차림을 하고 있다. 나무 쇠를 메고 싸움터로 나가기 전에, 동서 양편에서는 풍물을 치고 깃발을 흔들어서 제각기 필승을 다짐한다.
외지주민들은 자기 마을의 서낭대를 앞세우고 각기 영기(令旗)를 들며, 본부에서는 총사령부기 · 대장기 · 중장기 · 소장기 · 동방청제장군기(東方靑帝將軍旗) · 북방흑제장군기(北方黑帝將軍旗) · 농기 따위를 만들어서 기세를 올리므로 깃발의 숲을 이루게 마련이다.
깃발 뿐만 아니라, 각 마을에서 참가한 농악대도 나무쇠싸움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데 큰 몫을 담당한다. 풍물은 나무쇠싸움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다. 대장으로부터 출진의 영이 떨어지면 군사들은 나무 쇠를 어깨에 메며, 대장은 소의 머리 가운데에, 중장과 소장은 대장의 좌우 양편에 올라선다.
출진 행렬은 서낭대와 농악대 그리고 나무 쇠의 순서로 이어지는데, 이때 수많은 참가자들은 깃발을 흔들며 나무 쇠를 옹위한 채 이어나간다.
예전에는 드넓은 보리밭에서 이 싸움을 벌였으나, 요즈음에는 학교운동장으로 바뀌었다. 싸움터에 도착한 동서 양 진영은 주위로 빙빙 돌아가며 제각기 결전을 다짐하는 진(陣)놀이를 벌인다.
한동안의 진놀이가 끝나면 다시 양 대장의 지휘 아래 나무 쇠를 상대편 가까이 붙였다가 물러섰다가 하는 어르기를 시작하여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결전의 시각이 되면 양편의 소는 20∼30m의 간격을 두고 마주섰다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어서 맞부딪는다. 두 편의 군사와 응원군들은 이 때를 놓칠세라 각기 상대의 나무 쇠에 올라서서 몸싸움을 벌이며 상대의 소를 조금이라도 아래쪽으로 내려뜨리려고 안간힘을 다한다.
이 놀이의 승리는 상대방 위에 올라서는 쪽에 돌아가기 때문이다. 가지 가지의 준비과정이나 결전에 도달하기까지의 여러 가지 행사에 비하여, 승패는 순식간에 결정되는 듯하지만, 수십 명이 어깨에 멘 채 소를 충돌시키는 순간의 장쾌함은 다른 민속놀이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이 놀이의 유래에 대해서는 풍수적 설화만이 전할 뿐이나, 두 가지 측면에서 이의 발생을 고찰할 수 있다. ① 나무쇠싸움은 소싸움에서 연유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소싸움은 각 마을을 대표하는 황소를 내세워 싸움을 붙여서 승패를 결정하는 놀이로, 추수 뒤에 경상남도지방에서도 널리 행하던 민속놀이의 한가지이다.
사람들은 소의 용맹성을 북돋우기 위하여 싸움 직전에 소주를 먹이기도 하며, 씨름의 경우처럼 가장 힘이 센 소는 장원이라고 하여 주인에게 후한 상이 돌아간다.
관중들은 이 소싸움에 내기를 걸기도 하는데,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조선의 향토오락≫(1941)에 의하면, 우리 나라의 15개 처에서 소싸움이 벌어졌으며, 그 가운데 11개 처가 영산 근방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소싸움에서 나무를 소처럼 꾸며서 싸우는 나무쇠싸움이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② 안동 지방의 동채싸움(일명 차전놀이)과의 관련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동채나 나무 소는 모두 나무로 만들며 형태도 비슷하다. 즉, 동채를 일으켜 세우면 바로 나무 소의 형상이 되고, 맞부딪칠 때 조금이라도 높이 올라서는 쪽이 이긴다는 규칙 또한 같다.
대장이 각기 올라타고 손으로 지휘하는 점, 벌이는 시기가 정월 대보름인 점, 편제가 동서 양편으로 이루어지는 점, 나무를 벨 때 산신에게 고사를 올리는 점 등 비슷한 점이 많다.
한편, ≪동국세시기≫에 춘천과 가평에서도 동채싸움을 벌였다는 기록이 있어 이들과의 연관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놀이는 일제강점기 30여 년간 중단되었다가 1968년에 다시 복원되었고, 1969년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재 기능보유자로는 김형권(金亨權: 보유종목은 木牛戰)이 있다. 현재 영산쇠머리대기는 놀이내용이 많이 변질되어 마을사람들의 공동축제를 겸하여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3·1문화제 행사의 하나로 행하여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