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크기 높이 270㎝, 너비 107㎝. 1972년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731년(영조7년) 동래부사(東萊府使) 정언섭(鄭彦燮)이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동래읍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수축의 내력을 적어 1735년에 건립하였다.
비명(碑銘)에 의하면 읍성의 원둘레가 3,090척, 높이가 13척이었는데 1731년 정월에 성터를 측량하여 경상도 64개군에서 5만2000명의 민정(民丁)·승군(僧軍)을 동원하여 연인원 41만7050명, 전(錢) 1만3454량(兩), 포(布) 1,552석(石), 미곡(米穀) 4,585석으로 동년 4월에 성벽을 축조하고, 이어 5월에 성문, 7월에 문루를 완공하고 난 뒤 둘레 1만7291척, 높이 17척의 성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비는 동래비 연구의 가장 정확한 자료가 되는 동시에 조선 후기 축성사의 귀중한 자료이다. 원래 동래성 남문 밖에 있었던 것을 금강공원 안에 있는 독진대어문(獨鎭大御門) 뒤쪽에 옮겨 놓았다. 비의 전면(前面)에는 축성에 관한 사실을 20행으로 기록하고 후면(後面)에는 축성에 종사한 임원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비두(碑頭)는 1쌍의 이수(螭首)가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비대(碑臺)에는 연화문이 양각되었는데, 그 수법은 소박하다. 비문의 내용은 승훈랑(承訓郞) 행황산도찰방(行黃山道察訪) 김광악(金光岳)이 기록하고, 유학(幼學) 송광제(宋光濟)가 글을 썼으며, 통훈대부행현풍현감(通訓大夫行玄風縣監) 유우기(兪宇基)는 전자(篆字)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