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신의 크기 250㎝×122㎝×20㎝, 이수의 크기 160㎝×100㎝×40㎝, 좌대 190㎝×100㎝×50㎝. 1972년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남문비는 임란 당시 왜적의 대군과 분전을 거듭하다가 순국한 동래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1670년(현종11)에 당시의 격전지인 남문 밖 농주산(弄珠山, 현 동래경찰서 자리)에 세운 것으로, 그 후 1688년(숙종 14) 부사 이덕성(李德成)이 중창하고 1709년 동래부사 권이진(權以鎭)이 충렬사(忠烈祠)에 별사(別祠)를 세웠을 때 그 앞뜰에 이건하였다.
1736년(영조12)에 별사를 없애자 다시 이전하여 구(舊) 대동병원 건너편에 세웠다. 1778년 도로 확장으로 다시 이전하여 현 위치인 부산광역시립박물관 뜰에 이전 설치하게 되었다. 이전 직전의 비신의 비명(碑銘)은 거의 벗겨져서 상부에 약간의 글만 남았고 비신의 박탈을 막기 위하여 좌대에서 비신의 하부 등에 시멘트를 발랐다.
이수(螭首)와 비신은 같은 석질인 사암(砂岩)이고 조각은 우아한 수법으로 예술적 가치가 높다. 그러나 화강암 대석은 시멘트로 오랫동안 덮여 있어서 시멘트 독으로 상하에 얼룩이 져 있다. 비문은 부산지방 임란 때의 순절사적이 적혀 있는데 글은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글씨는 송준길(宋浚吉)이 썼으며 전자(篆字)는 이정영(李正英)이 썼다.
1996년 2월 부산광역시립박물관에서는 원래의 형태가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새로 복제하여 만들어 세웠다. 비신의 글씨는 김용옥이 쓰고 전자는 명장(名匠) 김상규가 새겼다. 인쇄된 비문(碑文) 내용은 오제봉(吳濟峯)이 감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