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조선 전기, 충청남도 서산군 해미면에 있는 돌로 쌓은 읍성.
건립 경위 및 변천
조선 태종 16년(1416) 덕산(德山)에 있던 충청도 병마절도사 병영(兵營)을 이곳으로 옮기는 논의가 시작된 이후 세종 3년(1421) 이전이 완료되었고 그 기간에 성이 완성되었다. 이와 같이 이곳 해미성은 다른 일반적인 읍성과 달리 처음에는 고을의 치소(治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병영성으로 조성된 것이었다.
문종 원년(1451) 충청 전라 경상도 체찰사(體察使)였던 정분(鄭苯)이 하삼도의 읍성을 조사하여 올린 보고에 의하면 해미의 병영성은 충청도의 홍주, 비인, 남포, 보령, 당진, 면천 읍성과 더불어 그대로 사용하도록 한 읍성의 하나였다. 당시 기록에 둘레 3,352척, 높이 12척, 여장(女墻) 높이 3척(688개소), 적대(敵臺) 18곳 중 16개소는 아직 쌓지 않았고, 성문 4곳에 옹성(甕城)을 두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 외에 성 안에 우물 3곳이 있고, 성 밖의 해자(海子) 둘레는 3,626척이라 하였는데, 이러한 기록은 현재 읍성의 규모와 형식이 충청 병영성으로 조성될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 준다.
이후 성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현(縣)의 동쪽으로 돌로 쌓은 병마절도사의 병영(兵營)이 있는데, 성의 둘레는 3,172척에 높이 15척이라 하고 내부에 세 개의 우물과 군창(軍倉)이 있다는 기록과 진남문(鎭南門) 아래 인방석에 쓰인 ‘황명홍치사년신해조(皇明弘治四年辛亥造)’라는 글을 통하여 성의 일부를 고치고 성벽을 높이는 등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이후 효종 3년(1652) 충청병영을 해미에서 청주로 옮기고, 비로소 해미읍성 안에 해미현 치소와 호서좌영(湖西左營)이 들어서게 됨으로써 해미는 병영성에서 읍성으로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영조 때의 기록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성의 둘레와 높이가 각각 6,630척, 13척이고, 북문은 없고 남문은 홍예문으로 3칸 규모의 2층 누각 형식이고, 동문과 서문도 각각 3칸이라 하였다. 그 외 초루(譙樓)와 포루(炮樓)는 없으나 옹성이 2곳에 있다 하였는데, 현재 옹성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여기서의 옹성은 현재 남아 있는 치(雉)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조선 후기 헌종 15년(1849)년 건립된 「좌영루첩중수비문(左營樓堞重修碑文)」에 의하면 당시 성첩이 붕괴되고 문루가 다 허물어졌기에 밀양 박민환(朴民煥)이 현감으로 부임하여 자금을 끌어모아 대대적인 수리를 시작하여 1848년 동문, 서문, 남문을 차례로 준공하였다고 하였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1916년 소실되었던 서문〔정분문(靜氛門)〕과 1926년 붕괴되었던 동문[규양문(葵陽門)], 그리고 현재의 남문[진남문(鎭南門)]은 이때 개축된 것으로 보인다.
해미읍성이 그 기능과 모습을 잃게 되는 것은 갑오개혁 이후다. 지방 행정 체제가 23부제로 변경되면서 읍성의 기능이 폐지되었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읍성 내부에 있던 공해 시설이 훼철되고 멸실되었다. 다만, 이때에도 다른 지역 읍성의 경우 성벽을 허물고 도로를 내거나 건물을 짓는 등 그 원형이 훼손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에 비하여 본 읍성의 성벽은 훼철되지 않고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였다.
형태와 특징
발굴 조사 결과 기록에서와 같이 읍성 외곽으로 해자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또한 축성 과정에 충청도 각 지역의 도민들이 동원되어 구간별로 책임을 지고 공사하였음을 성돌에 새겨진 각자석(刻字石)을 통해 알 수 있다.
의의 및 평가
조선 초기 축성 연대가 정확하고, 비록 성내 시설 대부분 멸실되거나 훼철되었으나, 기록으로 전하는 당시 축성 규모와 형식이 일제강점기와 근대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크게 훼손되거나 훼철되지 않고 유지됨으로써 지방 읍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참고문헌
원전
- 『세종실록지리지』
- 『문종실록』
- 『여지도서』
단행본
- 『서산군지』(서산군지편찬위원회, 1975)
- 『문화재대관』(문화재관리국, 1976)
논문
- 김진우, 「문헌을 통한 해미읍성 고찰」(『아시아문화연구』 24, 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2011)
- 김회정‧이정수, 「해미읍성 객사의 위치 및 건축구성 연구」(『건축역사연구』 21, 한국건축역사학회, 2012)
- 임선빈, 「조선시대 해미읍성의 축성과 기능변천」(『역사와 담론』 58, 湖西史學會, 2011)
기타 자료
- 「해미읍성 정비계획」(서산시, 2012)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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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세 지방을 통틀어 이르는 말.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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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거나 한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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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 성문 양옆에 외부로 돌출시켜 옹성과 성문을 적으로부터 지키는 네모꼴의 대(臺).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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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
: 군대의 창고.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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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7
: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문과 벽이 없이 다락처럼 높이 지은 집.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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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8
: 궁문, 성문 따위의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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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0
: 성벽에 기어오르는 적을 쏘기 위하여 성벽 밖으로 군데군데 내밀어 쌓은 돌출부. 성벽을 앞이나 옆에서 보호하는 구조물로서, 그 위에 성가퀴를 쌓았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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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1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거나 한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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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2
: 헐어서 치워 버림.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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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3
: 땅이 비탈지고 조금 높은 곳.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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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4
: 두 직선 또는 두 평면이 직각을 이루며 교차하는 일.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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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5
: 지방 관아에서 고을 원(員)이나 감사(監司), 병사(兵使), 수사(水使) 및 그 밖의 수령(守令)들이 공사(公事)를 처리하던 중심 건물.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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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7
: 지세(地勢)가 산을 뒤에 두고 있음.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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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8
: 어떤 지역의 행정 사무를 맡아보는 기관이 있는 곳.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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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9
: 관가(官家)의 건물.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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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0
: 쇠로 만든 독처럼 튼튼하게 둘러쌓은 산성이라는 뜻으로, 방비나 단결 따위가 견고한 사물이나 상태를 이르는 말.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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