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웅천은 원래 신라의 웅지현(熊只縣)으로 경덕왕 때에는 웅신(熊神)이라 하여 의안군(義安郡)의 속현(屬縣)이었다.
고려 현종 때에는 금주(金州)에 예속되었으며 조선 세종 때 구자(口子: 군사요충지)를 설치하여 첨절제사(僉節制使)를 두었는데 문종 때 지금의 명칭으로 고쳐 현감을 두었다.
1407년(태종 7) 일본과의 선린책으로 내이포(乃而浦)를 개항하여 일본과 무역을 하게 되자 일본인의 불법거주가 많아져 이를 막고 읍면을 보호하기 위하여 1437년(세종 19) 웅천수군첨절제사영(熊川水軍僉節制使營)으로 축조한 것이 이 석성이다.
1451년(문종 원년)에는 왜구의 방어를 위하여 동 · 서 · 북의 세 곳에 수로를 만들어 성을 일부 확장하였으며, 1510년(중종 5)에는 삼포왜란(三浦倭亂)으로 일시 왜구에게 함락되기도 하였고, 임진왜란 때에는 고니시(小西行長)가 주둔하였다. 당시 성의 규모는 ≪동국여지승람≫ 성곽조(城廓條)에 “석축의 둘레가 3,514척이고 높이는 15척이며 성안에는 2개의 우물이 있다”라고 적고 있다.
동문지(東門址)의 길이는 4m이며 성벽의 높이는 5∼8m, 너비는 3m인데, 지금 남아 있는 총 길이는 약 500m이고 동벽 북쪽 끝의 남쪽 10m 지점에 누지(樓址)가 남아 있다. 성의 기단부는 장대석을 다듬어 한 단으로 쌓고 그 위에 장방형이나 삼각형 면석을 쌓아 위로 올라갈수록 작아지고 있다. 대형 면석의 사이사이에는 작은 돌을 끼워 견고함을 더하였으며 지면과 거의 수직으로 축성하였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보존관리를 하지 않아 일부 성이 허물어진 것을 읍민들이 다시 축성한 곳도 있으나 동 · 서 · 남쪽에 남아 있는 부분은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 웅천읍성의 서쪽에는 감포산성(甘浦山城)과 소산성(小山城) 등 두 개의 지성(支城)이 있는데, 이것은 임진왜란 당시 왜장 소(宗義智)와 마쓰우라(松浦鎭信)가 각각 수비하고 있던 성이고, 남산의 서쪽에 있는 제포(薺浦)는 삼포의 하나로 옛날의 개항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