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운 ()

강화도 나루
강화도 나루
산업
개념
하천이나 강의 물길을 따라 사람이나 물건을 배로 실어 나르는 운송수단.
정의
하천이나 강의 물길을 따라 사람이나 물건을 배로 실어 나르는 운송수단.
개설

대체로 조선시대의 법전류에서는 조세운송을 조전(漕轉)이라 하였으나 일반적으로는 조운(漕運)이라 하였다. 특히 하천을 통한 운송을 수운(水運) 또는 참운(站運)이라 하여 바다를 통한 해운(海運)과 구별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해운만을 조운이라고 하고 수운과는 별도로 구분하기도 하였다.

일찍이 뛰어난 지리학서를 만든 이중환(李重煥)은 그의 ≪택리지≫ 생리편에서 “물자를 옮기어 바꾸는 방도는 말이 수레와 같지 않고, 수레는 배와 같지 않다. 우리 나라는 산이 많고 들이 적으므로 수레가 다니기에 불편하다. 이러한 까닭으로 배에 화물을 싣고 운반하여 생기는 이익보다 못하다.”고 하였다. 이는 교통기관이 오늘날처럼 발달하지 못한 전근대사회에서 특히 바다 혹은 하천을 이용한 운송의 편리함을 강조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 이래로 세곡(稅穀) 운송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조운제도가 점차 확립되어갔다. 그에 따라 국가의 수운에 관한 정책도 이를 중심으로 전개되어갔다. 그러나 인류에게 의식주의 본원을 공급해 준다는 의미에서 볼 때 강이나 내의 기능은 조운에만 지나치게 큰 비중을 둔 나머지 민수용품의 수송, 즉 교역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넓은 뜻의 수운은 강이나 내의 물 뿐만 아니라 바다의 물을 이용한 운송을 의미하며, 좁은 뜻의 수운은 강이나 내의 물을 이용한 운송을 의미한다. 한편 조운은 주로 세곡 등 공공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운송인 데 비하여, 수운은 공적인 수요 뿐만 아니라 사적인 수요 충족을 위한 운송을 포함한다.

우리 나라의 경우 수운이 가지는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즉, 하상계수(하천의 최대유량과 최소유량의 비율)가 높기 때문에 중수기를 제외한다면 갈수기에는 하천바닥이 드러나는가 하면 결빙기에는 이용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적 질서와 관련하여 억상정책이 실시됨으로써 자연스러운 수운의 발달이 저해된 것도 사실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연적·인위적 제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의 상업발전은 수운에 힘입은 바가 크다.

수운의 변천과정

상고시대(삼국 이전)의 수운

사회적 분업의 진전에 따라 물물교환을 중심으로 교역이 점차 증가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지만 교통로로서의 수운의 이용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선사시대 이래로 여러 하천은 이를 중심으로 취락이 형성되어 동일문화권을 이루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 하천을 통한 교통 및 문화전파는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이다.

신석기시대의 옥제품이 특히 두만강유역에서 다수 출토되는데, 그 중에서도 백옥은 바이칼호지방과 흑룡강 상류일대에서 널리 분포된 것으로서, 이는 이들 지역과의 교역이 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한강유역인 암사동에서 담수산(淡水産)과 함께 함수산(鹹水産) 조개들이 발견되는 것은 이들 주민이 한강을 이용해 서해안 주민들과 접촉이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청동기에 이어 철기의 사용이 본격화되면서 교통로로서의 수운의 구실은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하천을 중심으로 어로지역·수렵지역 및 농경지역 상호간의 유통이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한편 야철(冶鐵) 사업의 경우 특히 낙동강 하류에는 철이 많이 생산되어 일종의 화폐로 사용하였고, 낙랑·대방과 일본에까지 수출하였다. 이는 경상도 내륙지방에서 만들어진 해면철(海綿鐵)이 일단 낙동강 강구(江口)지방으로 집하되어 거기서 선편으로 일본이나 평양지방으로 출하되었을 것이다.

낙동강이 그 당시에 중요한 교통로나 교역로로 되어 있었을 것은 물론이며 가야토기 중에 보이는 납작한 토제선형토기(土製船形土器)는 낙동강을 오르내리던 원삼국시대의 배를 본딴 것이었을 것이다.

제철사업의 중심지였던 대구와 경주지구에는 부력(富力)을 축적한 집단이 지배적 존재로 등장하고 부족사회의 통합을 거듭하여 결국은 이를 배경으로 하는 집단의 지도자가 이 지역 고대국가의 건립을 주도하였을 것이다.

조선 태종 1년(1401)에, 삼한 이래 공부는 모두 해도(海道)를 통하였기 때문에 남부지방 사람들은 주즙(舟楫)에 익숙해 있었다는 박순지(朴恂之)의 말은 당시 내외 선운(船運)의 발전을 암시하고 있다.

고대(삼국과 통일신라)의 수운

한족(漢族)과의 투쟁을 통해서나 혹은 삼국(고구려·백제·신라)간의 갈등관계 속에서도 정복전쟁은 고대국가 확립과정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수운의 역할은 특히 군사전략적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했다. 즉, 수운로(水運路)를 보호함으로써 군수물자 수송의 안전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뿐 아니라 역으로 수운을 통한 적의 내습을 미연에 방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삼국시대를 전후하여 한강 연안에 설치된 수많은 축성(築城)과 설책(設柵)은 바로 이러한 목적에서 설치된 관방(關防)들이었다. 그러나 역시 중요한 것은 전략적 측면과 더불어 교통로로서의 경제적 측면이라고 하겠다. 이 점에서 한강을 위시한 금강·대동강 혹은 낙동강의 수운로로서의 기능은 중요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 하천들은 내륙수로를 통해 대외적으로 교통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배후지의 풍부한 산물은 삼국의 경제적 기초가 되었을 것이다. 이 시기 반도의 중심을 이룬 한강유역을 둘러싸고 삼국이 상호쟁탈전을 벌인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남한강과 북한강의 합류점 부근에서 성장한 백제는 서해안지방과 내륙지방을 연결하는 수로와 남북의 육로가 결절(結節)하는 전략적 이점을 많이 받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남한강유역의 풍부한 목재를 하류로 운반해 일부는 낙랑으로 수출하였고, 서해안의 어염(魚鹽)은 상류지방으로 수송하여 경제적인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또한 뒤이어 한강유역을 차지했던 고구려는 한강수로를 통하여 군수품을 용이하게 남방(南方)으로 수송하였고, 동시에 남한강유역의 목재와 철을 가져갈 수 있었으며, 북부지방에서 귀한 미곡을 구하고 동시에 어염무역도 독점하였다.

한때 고구려의 남침으로 낙동강 상류지방까지 상실했던 신라가 진흥왕 때에는 소백산맥을 넘어 남한강 상류까지 진출한 데 이어 한강 하류지방까지 점령하여 신주(新州)를 설치하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한강수로는 병참로(兵站路) 구실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신라가 남한강유역인 충주와 원주에 소경(小京)을 두고 이천과 여주에 군사기지인 정(亭)을 설치한 점에서 잘 반영되고 있다. 한반도 하천의 대분분이 동북서남주향(東北西南走向)의 산맥과 평행하기 때문에 유역간의 연계가 어려운 반면 한강과 낙동강은 두 하천 사이의 약 40㎞ 거리를 연수륙로(連水陸路)로 연결할 경우에 500㎞가 넘는 한반도 중앙부를 종관(縱貫)하는 수송로가 형성되는 것이며 이러한 전략적 관점은 결국 이 지역을 점령한 신라의 한반도 지배를 공고히 해 주는 구실을 하게 된 계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중세(고려와 조선)의 수운

세곡운동(稅穀運送)으로서의 수운 이용이 제도적으로 확립되는 것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그것은 대체로 조운체계의 완성과정과 일치하고 있다.

당초 호족연합 정권적 성격이 강했던 고려왕조는 신분적으로 편성된 중층적 군현제를 통하여 지방을 간접 지배하고 있었다. 호족들에 의해 각 하천유역이 할거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수취체제의 근간인 세곡의 운송도 이미 재지지배구조(在地支配構造)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국가는 금유(今有)·조장(租藏) 혹은 전운사(轉運使)를 두어 세곡의 징수·보관 내지는 운송 등을 기능적으로 장악할 따름이었다. 다만 공전(公田)·사전(私田)을 막론하고 그 전조(田租) 수입의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행함으로써 국가의 의지를 실현하고 있었다. 따라서 해양과 하천을 통한 조운기구의 원만한 운영은 국가적인 주요 과제의 하나였다.

그러나 세곡의 수취와 왕도(王都)까지의 운송 등의 업무는 당해지역을 관할하는 지방군현의 주관하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하부지방기관은 ‘강(江)’이라든가 ‘포(浦)’로 불리었고, 이는 각각 도선장(渡船場) 혹은 곡물의 집적 및 수송을 담당하는 수상운수기관으로서의 기능을 가졌으며, 촌락을 단위로 하는 행정구획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강’은 원래 항행(航行) 가능한 대상(帶狀) 수역을 뜻하였는데, 각 군현으로부터 징수된 세곡이 일단 ‘강’에 운반되면 ‘포’까지는 강민소유(江民所有)의 50석 정도의 주운선(舟運船)으로 운송되었다. 세곡운송을 직접 담당하는 사람은 선두(船頭)라고 불리는 향리였고 그 밑에는 사공인 소공(梢工)·수수(水手) 등이 있었다.

성종 이후 군현지방체제가 강화되면서 조운 비용을 국가적으로 규제하는 수경가(輸京價)가 제정되고 또한 ‘강’·‘포’의 명칭도 바뀌면서 상대적으로 재지세력의 자율적인 수취기능은 축소되고 조운업무도 오히려 점차 역(役)으로 인식되어갔다.

종전의 ‘포’ 단위의 운송체계도 13개의 조창(漕倉)을 중심으로 개편되었으며, 모미(耗米)가 획일적으로 징수되었다. 이는 수취기구 전반에 걸친 국가적 통제력의 강화를 의미하였다.

이 시기의 수운은 전체적으로 볼 때 조운체계의 일환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즉, 근기(近畿)지방의 경우에는 육운과 수운을 이용하여 직접 수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한강유역은 수운으로써, 바다와 인접한 남·서부지방은 조운로를 통해 세곡을 운송함으로써 조운체계가 완성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개경을 중심으로 동서 양쪽 강에 좌창·우창이 설치되어 예성강과 한강 그리고 바다와 합류되는 지리적 위치를 이용하여 고려왕조는 국가재정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빈번한 해난사고, 특히 고려 말기 왜구에 의한 수운로의 피습으로 인해 수운의 역할과 기능은 자못 증가되었다. 그 결과 낙동강과 한강을 연결하는 연륙수로의 운영이 중요시되었다.

한강에는 덕흥(德興)과 흥원(興元) 2개 소의 조창이 운영되었는데, 여기에는 해운에서 이용되는 대규모의 초마선(哨馬船)보다는 적재규모 200석 정도의 평저선(平底船)이 20척 또는 21척씩 배치되어 소량씩 운송되었다. 이에 국가는 판관(判官)을 두어 수운을 통한 조운을 감독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 수취체제의 모순과 잇따른 외환으로 인해 조운체계가 마비되어갔다.

수운을 포함하여 조운 전체계에 대한 국가적 통제도 상실되면서 다시 사선(私船)에 의한 조만지비(漕挽之費)가 징수되고 있었다. 이따금 수운은 왜구침입의 통로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나 역으로 최영(崔瑩)의 홍산대첩(鴻山大捷), 나세(羅世)와 최무선(崔茂宣)의 진포대첩(鎭浦大捷) 등 금강의 수운이 왜구격퇴에 이용된 경우도 있었다.

조선 초기 한양천도를 결정함에 있어서 고려된 여러 조건 중 가장 큰 것은 조운에 관한 것이었다. 개성 주위 예성강의 하상(河床)이 높아져서 수운이 점차 어렵게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조운로의 재정비와 제도적 완비를 우선적 사업으로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세조는 국방체제를 완비하고 선척의 부족도 타개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병선(兵船)과 조선(漕船)을 일원화함으로써 관선조운체계(官船漕運體系)를 확립하였다. 관선조운체계는 대체로 ≪경국대전≫ 반포를 계기로 조창의 설치 및 조운의 운영에 관한 규정이 매듭지어졌다. 이에 따르면 해운창(海運倉) 4개와 수운창(水運倉) 5개를 설치하여 육운을 제외한 전국의 조세를 수납하게 하였다.

이 시기 참(站)은 한강을 통한 공물(貢物)의 수송을 목적으로 1390년(공양왕 2) 정몽주(鄭夢周)의 건의로 처음 수변(水邊)에 설치된 교통기구이며, 과천 흑석참(黑石站)에서 충주 금천참(金遷站)까지 6개 참이 두어졌으므로 수운을 참운(站運)이라고도 하였다. 그리하여 경기도에는 전함사(典艦司) 소속으로 수운판관(水運判官)이 두어져 수운을 관장하였다.

그런데 좌도수운판관이 한강 중상류인 충주의 가흥창(可興倉), 원주의 흥원창(興原倉) 및 춘천 소양강창(昭陽江倉)의 남도(南道) 세곡을, 우도수운판관이 배천(白川)의 금곡포창(金谷浦倉) 및 강음(江陰)의 조읍포창(助邑浦倉)과 같은 황해도의 세곡을 각각 경창(京倉)으로 운송하게 하였다.

그리고 특히 가흥창은 전대(前代)의 덕흥창에서 유래한 것으로 경상도의 낙동강 상류의 모든 읍과 충청도의 한강수계(漢江水系) 여러 지역의 세곡이 이곳에 집결되어 수운을 통해 경창으로 보내졌다.

1392년(태조 1) 이래 한양 남쪽 한강변에 설치된 경창은 중앙창고를 말하는 것으로서, 용산강변(龍山江邊)에 위치하여 경상도·강원도·충청북도, 경기도 상류의 조세를 집적하던 군자창(軍資倉)과 풍저창(豊儲倉), 서강변(西江邊)에 위치하여 서해·전라도·충청남도, 경기도 하류의 조세를 수집하던 광흥창(廣興倉)·풍저창이 있었다.

관선조운체계하에서는 관영조선(官營造船)과 조졸(漕卒)의 확보는 필수적이었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당시 선척의 규모는 해선·강선을 막론하고 대선·중선·소선으로 구분되었다.

조운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사공·격군(格軍)·조군(漕軍)·수부(水夫) 등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흔히 조졸이라고 하여 거의가 세습직으로 신량역천(身良役賤)에 속한 계층이었다. 국가는 조운로(漕運路) 관리에 특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수운의 경우에는 1395년 정월에 용산강에서 충주 연천에 이르는 사이에 수로전운소완호별감(水路轉運所完護別監, 水站轉運別監) 7개 소를 두어 수로의 안전을 도모하였으며, 1414년(태종 14) 12월에 이르러서는 수참전운사(水站轉運使)로 고쳐 사(使)·부사(副使)·판관 등을 두어 하천이 수천(水淺)하게 되면 노출된 수중암석을 제거하게도 하였다.

유형원(柳馨遠)에 의하면 조세(漕稅)는 전세(田稅)라고 할 만큼 전세총액 중에서 조세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고, 성종대의 경우 해운 대상지역은 충청남도와 전라도지역에 한정되고 있어서 수운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높았다.

그러나 관선조운이 가지는 문제점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관장제(官匠制)를 통해 만들어진 대선(大船) 중심의 관선은 선박구조상의 결함을 가지고 있었으며, 부역제 운영하에서 역중으로 인한 피역(避役)은 조졸의 확보를 어렵게 하고 있었다.

전반적인 추세는 바야흐로 관선조운의 쇠퇴를 가져왔다. 반면 이를 대신한 사선조운이 증가되어 1529년(중종 24) 기록에 의하면 당시 조운은 사선에 의존하고 있었다. 사선의 등장은 고려시대의 완전한 예속적 노동형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계약적 임노동(賃勞動)관계로 경영형태가 발전하였음을 의미하였다.

사선은 어업과 상업활동 그리고 도선업에도 종사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조운경험은 향후 연안해로 혹은 내륙수로를 통해 소금·목재·미곡 운송을 함으로써 전국적인 상업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특히 지조임운(地助賃運)이 활발하여 용산·마포·서강 등지의 한강변은 국가의 세곡 뿐만 아니라 지방농장의 지조도 이곳에 집결되어 다시 각 지주가(地主家)로 수송하였다.

지주 가운데는 사적으로 선박을 소유하기도 하였으며 중종 때에 이르러 이들 선운업자들은 경중(京中) 물가를 좌우할 만큼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성장하였는데 이들은 경강선(京江船)의 소유자들이 주축이 되고 있었다.

근세의 수운

조선 후기의 사회변동과 관련하여 수운에 있어서도 여러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농업생산력의 증대에 따라 상업활동이 활발해지고 있어서 이는 장시(場市)의 확대, 농촌과 어촌 그리고 도시 상호간의 교역을 증대시키고 있었다.

특히 지조운송도 크게 늘어나고 있었다. 또한 부역제적 관선조운제가 붕괴되면서 고립제(雇立制)·임선제(賃船制) 등 임노동에 입각한 청부적 성격의 사선조운이 성장하고 있었다.

한편 대동법 실시를 비롯한 수취체제의 변화는 세곡운송량의 증대 및 화폐사용의 확대를 유발하였고, 조운체계에도 변화를 가져와 강상(江商)을 비롯한 상인들의 상업활동을 촉진하였다.

위와 같은 전반적 변화 속에서 수운은 과거의 조운 중심에서 보다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 나가고 있었다. 특히 이 시기의 경강은 조운로의 집결지이며 교통의 중심지로서 상업기지의 임무도 담당하고 있었다. 사상인들은 이러한 유리한 조건하에서 세곡 및 지조운송을 통해 경제력을 쌓아가고 있었다.

특히 대동법의 실시는 막대한 운송물량을 사선에 의존해야 하였다. 그리하여 17세기 이래로 삼남지방의 세곡 운반은 거의 경강선을 중심으로 한 사선에 의존하고 있었다. 조운의 경우에는 한정된 물품을 특정한 계절에 한하여 수송한 데 비해 선상의 활동은 결빙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연중무휴로 행하여졌으며, 그들의 취급품목도 생활필수품 전부를 포함하였다. 또한 조운은 지방의 산물을 일방적으로 중앙으로 수집해간 것과는 달리 상인들은 상류와 하류의 산물을 교역시켜 양지역의 생산활동을 촉진하고 있었다.

세곡을 운송하는 사선에는 경강선 외에도 외방(外方)의 지토선(地土船)이 있었다. 이는 원래 지방주민의 어로를 비롯한 생계용 사선으로서, 대동법 시행 초기에는 관부의 불신을 받고 있었던 경강선보다는 이들 지토선이 세곡 운송의 주도적 임무를 하고 있었으나 자본과 항해술에 있어서 경쟁이 되지 못하였다. 지토선은 크게 해선과 강선으로 구분된다.

≪택리지≫에 의하면 한강의 상류와 하류를 오가며 고기잡이나 장사를 하였는데, 남쪽으로는 청풍(淸風)의 황강리(黃江里), 충주의 금천진(金遷津)과 목계촌(牧溪村), 원주의 흥원창 부근, 여주의 백애촌(白涯村), 그리고 동북으로는 춘천의 우두천(牛頭川), 낭천(狼川)의 원암촌(元巖村), 연천의 징파도(澄波渡) 등지를 오가며 주로 농산물·소금·목재 등을 교역하였다.

이곳 주민들 가운데는 배를 가지고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되기도 하였다. 특히 연안·배천 연해안 주민은 연해안 뿐만 아니라 예성강·임진강·한강을 오가며 곡물·면화·생선·소금 따위를 거래하였다. 이 시기 국가의 어세·염세 및 선세의 징수는 이들의 성장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시기 하천의 수로사정은 점차 정상적인 선박운항이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자연적 장애를 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삼림의 남벌과 화전경작에 따른 토양의 침식과 수원의 고갈은 하상을 높이는가 하면 갈수기에는 선박의 통행을 어렵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수로를 개수하는 한편 수로조건에 맞는 운항법(運航法)을 개발하였다.

조선시대 남한강의 선박들은 바닥이 평평하고 넓으며, 뱃전이 얕고 해선에 비해 길이가 길며 폭이 좁은 배를 만들었다. 갈수기에는 하상에 퇴적된 모래를 깊게 파내어 배가 통과할 수 있도록 간이운하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때에는 수참수부(水站水夫)가 아닌 인근주민이 파낼 경우 ‘골세’라는 통행료를 지불하였다. 전반적인 수로조건이 좋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천수로의 운용선수와 화물수송량은 조선 후기에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한편 개항기를 맞이하여 교통기관의 근대적인 수송기관을 이용할 수 있는 대비책은 전혀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일제가 수운에 직접 침투하기 시작한 것은 1912년 조선우선주식회사(朝鮮郵船株式會社)의 설립 이후이다.

이 회사는 연안 및 내륙수로에 근대식 증기선을 취항시켜 여객과 화물수송을 독점하려 하였으나, 조선의 수로에 익숙하지 못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1925년에는 <하천령시행규칙 河川令施行規則>을 제정하여 하천을 국토경영하에 두게 됨으로써 강안(江岸)에 제방이 축조되고 기항지가 폐쇄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수운의 발전을 직접적으로 가로막은 것은 일제하의 교통정책이었다.

일제 초 교통정책의 이면에는 전통적인 수송로의 기능을 말살하고 철도·신작로 등 자신들이 만든 교통로의 기능을 강화하려는 저의가 숨겨져 있었다. 이는 결국 조선의 전통적 상권을 잠식함으로써 식민지 수탈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철도 및 신작로가 개설되기 전에 있어서 낙동강·한강·대동강 등의 대하천은 물자 수송상 커다란 구실을 하여 운수계통은 오로지 이들 하천을 근간으로 하고 있었다.

1915년에서 1928년에 걸쳐 조사된 결과만 하더라도 생활필수품인 소금·생선·잡화류는 하천을 소항(遡航)하여 내륙으로 수송되고 하항할 때에는 곡물·목재·석탄·연초류를 반출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신의주에서의 뗏목과 대동강의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석탄의 반출이라든가 한강의 마포·용산을 향한 미곡과 소금의 소항, 그리고 금강에 있어서 군산과 강경 사이의 미곡운송, 낙동강 하류의 미곡수송 등은 특기할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운송수단, 특히 철도의 등장은 이상과 같은 수운의 맥을 점차 끊어놓았다.

현대의 수운

광복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운의 구실은 더욱 축소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국토의 분단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남북의 분단은 다른 부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수운에 정상적인 기능의 수행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즉, 한강과 임진강의 출구가 막히고 수운과 해운의 연결이 끊어짐으로써 수운의 중심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던 한강의 기능이 불구화되어 버렸던 것이다.

둘째로는 현대적 교통수단의 등장을 들 수 있다. 교통수단의 현대화가 계속 추진되면서 철도는 물론 고속도로와 같은 빠른 교통수단의 출현과 전국적인 교통망의 증설은 상대적으로 수운의 경제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셋째로 국토개발사업의 추진을 들 수 있다. 즉 부족한 전력설비를 확충하고 더불어 홍수조절 및 농공업용수 확보를 위해 설치된 발전용 혹은 다목적용 댐의 건설은 수로를 막아버림으로써 수운의 기능을 결정적으로 상실하게 하였던 것이다. 다만 댐의 축조로 인해 거대한 호수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결과 이를 이용한 새로운 형태의 관광용 수운이 열리게 된 것은 특기할만한 일이라 하겠다.

평가

전근대사회에서는 오늘날과는 달리 교통 및 운송수단으로서의 수운은 대단히 중요하였다. 특히 우리 나라의 자연적 조건은 그 중요성을 증대시키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물자수송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수운은 해운과 함께 조운체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 시기 국가재정의 원천이 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지배력의 범위와 크기는 바로 국가 권력의 내용을 규정하도록 되어 있었다.

또한 수운과 관련된 모든 변화는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변동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수운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바로 전근대사회의 속성을 파악하는 하나의 관건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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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리』(권혁재, 법문사, 1987)
「이조시대 조운제에 대하여」(이대희, 『조선학보』 23, 1962)
「안흥량대책으로서의 태안조거 및 안민창문제」(이종영, 『동방학지』 7, 1963)
「의항고」(이종영, 『사학회지』 2, 1963)
「경강 진·도·선에 대하여」(이현종, 『향토서울』 27, 1966)
「경강상인연구」(강만길, 『아세아연구』 14-2, 1971)
「우리 나라 4대강유역개발의 실태와 전망에 관하여」(김무일, 『경기공고논문집』 4, 1971)
「고려조운고」(손홍렬, 『사총』 21·22, 1977)
「조선전기 조운시고」(최완기, 『백산학보』 20, 1977)
「조선전기의 곡물 임운고」(최완기, 『사총』 23, 1977)
「금강수운의 변천에 관한 지리학적 연구」(나도승, 『공주사범대논문집』 16, 1980)
「조선시대조운제연구」(김입근, 『부산산업대논문집』 2, 1981)
「고려조의 세곡운송」(최완기, 『한국사연구』 34, 1981)
「금강수운 하항시장권의 변천에 관한 연구」(나도승, 『공주사범대논문집』 17, 1981)
「남한강 수운연구」(최영준, 『지리학』 35, 1987)
「조선후기 세곡운송과 선운업발달」(최완기,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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