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시 ()

하남 시가지
하남 시가지
인문지리
지명
경기도 중앙, 서울특별시의 동단에 위치한 시.
지명/행정지명·마을
면적
93.04㎢
인구
32만 9120명[2024년 12월 31일 기준]
행정구역
경기도 하남시
시청 소재지
하남시 신장동
공식 홈페이지
https://www.hana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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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하남시는 경기도 중앙, 서울특별시의 동단에 위치한 시이다. 동쪽은 경기도 남양주시·광주시, 남쪽은 경기도 광주시·성남시, 서쪽은 서울특별시, 북쪽은 경기도 구리시와 접한다. 백제 초기 도읍지 위례성이 춘궁동 일원으로 비정된다. 한강, 검단산 등 자연환경이 잘 어우러져 주거 환경이 쾌적하며, 미사·위례·교산신도시 개발로 인구가 급증하며 서울특별시의 침상도시적 성격을 갖고 있다. 광역교통망 확충과 신도시 개발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2024년 12월 31일 기준 면적은 93.04㎢, 인구는 32만 9120명이다.

정의
경기도 중앙, 서울특별시의 동단에 위치한 시.
개관

경기도 중앙, 서울특별시의 동단에 위치한 하남시는 동쪽은 한강을 건너 경기도 남양주시 · 광주시, 남쪽은 경기도 광주시 · 성남시, 서쪽은 서울특별시, 북쪽은 경기도 구리시와 접한다. 수리적 위치는 동경 121°08′~127°17′, 북위 37°28′~37°34′이다. 백제 초기 도읍지인 위례성이 춘궁동 일원으로 비정된다. 한강과 검단산 등 자연환경이 잘 어우러져 주거 환경이 쾌적하며, 미사신도시 · 위례신도시 · 교산신도시 개발로 인구가 급증하며 서울특별시의 침상도시적 성격을 갖고 있다. 광역교통망 확충과 신도시 개발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2024년 12월 31일 기준 면적은 93.04㎢이고, 인구는 32만 9120명이다. 행정구역은 14개 행정동, 24개 법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남시청은 신장동에 있다.

자연환경

남남서 방향으로 지나던 광주산맥이 이 지역에서 해체되고 곳곳에 구릉성 야산이 전개되고 있다. 동쪽에는 검단산(黔丹山: 658.3m), 남쪽에는 청량산(淸凉山: 497m), 중앙에는 객산(客山: 292.1m)이 솟아 있고, 산지와 연결되는 구릉지가 연속해 나타나고 있으나, 대부분은 고도가 100m 내외의 저산성산지(低山性山地)를 이룬다.

이들 산지 사이를 망월천(望月川), 초이천, 산곡천(山谷川), 덕풍천(德豊川) 등의 소하천들이 북류하여 한강에 합류하고 있다. 이들 하천은 낮은 지대를 흐르고 한강의 하상은 낮지 않아 홍수 시 한강물이 역류하여 주변 지역에 범람원이 넓게 나타난다. 시의 북쪽은 한강이 북서류하다가 미사동 부근에서 남서류한다. 지질은 화강편마암이 대부분이고 토양은 적황색토, 암쇄토가 구릉지에 나타나며 충적토가 하천 변에 나타나고 있다.

1991~2020년 평년값 기준 연평균기온은 12.6℃이고, 1월 평균기온은 -2.4℃, 8월 평균기온은 26℃로, 한서의 차가 28℃를 넘는다. 연강수량은 1,110.6㎜이다.

역사

지역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채집되었고, 신석기시대 유적으로 널리 알려진 미사동의 선사주거지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인들이 이 지방을 생활 터전으로 삼았음을 보여 준다. 또한 초기 백제삼국시대의 토기가 출토되어 청동기시대철기시대를 거쳐 삼국이 정립한 역사시대에도 이 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하남시는 백제의 건국 터전으로 초기 백제의 중심 무대였다. 근래 학술조사로 드러난 춘궁동, 초일동, 광암동 일원의 이성산성(二聖山城)한강 변에 위치한 삼국시대의 토성인 서울특별시몽촌토성(夢村土城), 삼성동토성(三成洞土城), 옥수동토성(玉水洞土城), 양진성(楊津城), 아차산성(阿且山城), 풍납동토성(風納洞土城), 암사동토성(岩寺洞土城)과 경기도광주시에 있는 남한산성(南漢山城)과 구산토성(龜山土城), 남양주시수석리토성(水石里土城)과 방사상으로 연관되어 전략적 요충을 이루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성산성의 남쪽에는 춘궁동, 하사창동, 상사창동의 넓은 평야가 자리하며, 이 평야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산성이 배후에 있는 지형적 특성을 지닌다. 이러한 점을 근거로 서기전 5년(온조왕 14)에 백제의 도읍지였던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 하남시 춘궁동 일원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한시대에는 진국(辰國)의 변경 지역이었으나 한강 유역으로 남하하는 유이민을 용납하기에는 가장 적당한 터전이었으므로 진한이 이 지방을 중심으로 부족국가를 형성하여 200여 년을 지내다 백제의 도읍지가 되었던 것이다.

백제 시조 온조(溫祚: ?28)는 처음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에 도읍하였다가 토지가 비옥한 이 지역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후 백제는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고구려신라 사이에서 삼국 쟁패의 치열한 각축을 벌였다. 371년(근초고왕 26)에는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도읍을 남평양(南平壤) 지금의 [서울특별시 지역]으로 옮겼으나, 475년(문주왕 1)에는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394491)의 공세에 밀려 이 지역을 상실하였다. 그 뒤로 이곳은 고구려의 영토가 되어 한산군(漢山郡)이라 불렸다.

551년(성왕 29) 백제 성왕(聖王: ?554)과 신라 진흥왕(眞興王: 534576)이 연합하여 한강 유역을 고구려로부터 탈환하였다. 그러나 553년(진흥왕 14) 신라는 이 지역을 점령하고 하남 일원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여 김유신(金庾信: 595~673)의 할아버지인 김무력(金武力)을 초대 군주(軍主)로 임명하였다. 신주의 위치는 춘궁동 이성산성 일원이나 교산동 건물지 일대로 추정된다.

이러한 사실은 1990년 이성산성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목간(木簡)에서 발견된 “戊辰年正月十二日朋南漢城道使須城道使村主前南漢城…(무진년정월12일붕남한성도사수성도사촌주전남한성…)”이라는 명문(銘文) 속 ‘남한성(南漢城)’이라는 단어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를 통해 신라가 이 시기 이전에 이미 한강 유역을 점령하였음을 알 수 있다. 557년에는 신주가 폐지되고, 한강 이북인 지금의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북한산주(北漢山州)가 신설됨에 따라 하남 일대는 그 관할에 속하였다.

568년(진흥왕 29) 북한산주가 폐지되고 지금의 경기도 이천에 남천주가 설치되어 하남의 소속처가 다시 바뀌었다. 604년(진평왕 26) 남천주가 폐지되고 다시 북한산주가 설치되었으며, 662년(문무왕 2)에는 다시 남천주를 설치하였다. 664년 신라는 남한산성과 그 일대를 한산주(漢山州)로 개칭했으며, 670년 남한산주(南漢山州)로 고쳤다가 757년(경덕왕 16) 다시 한주(漢州)로 바꾸었다.

940년(태조 23) 고려 태조(太祖)행정구역 · · · 으로 개편하면서 하남이 속한 지역은 광주(廣州)로 개칭되었다. 983년(성종 2)에는 전국에 12목을 설치하였는데, 광주도 그 가운데 하나로 승격되어 광주목(廣州牧)이 되었고 목사(牧使)가 파견되었다. 995년(성종 14) 12목 제도가 폐지되고 12주 절도사(節度使)가 설치되면서 다시 광주로 환원되었고, 봉국군(奉國郡)으로 불리며 관내도(關內道)에 속하였다. 1012년(현종 3) 절도사가 폐지되자 안무사(安撫使)가 설치되었고, 1018년 다시 광주목으로 개편되어 목사가 파견되었다. 이후 현종(顯宗: 992~1031) 대에 오도양계제(五道兩界制)가 정비되면서 양광도(楊廣道)에 속하였다.

1232년(고종 19) 몽골의 2차 침입 때 광주(廣州) 안무사 이세화(李世華: ?1238)가 남한산성에서 군민들과 함께 살리타이의 군세를 막아 승리하였다. 그러나 1310년(충선왕 2) 원의 압력으로 광주목이 폐지되고 광주부(府)로 강등되었다. 1356년(공민왕 5)에는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공민왕(恭愍王: 13301374)의 정책에 따라 다시 광주목으로 환원되었다.

1392년(태조 1) 조선 건국 이후 전국이 8도로 개편되어 하남 지역은 경기도에 속하였다. 1395년 한양이 도읍으로 정해지자 양광도수원부(水原府)와 7개 군 · 현과 함께 경기좌도(京畿左道)에 편입되었다. 읍치는 춘궁동 고골에 두었으며, 행정구역은 동 · 서 · 남 · 북의 4면으로 나뉘었다. 1456년(세조 2)에는 좌보(左輔)가 되어 우보 원주, 전보 수원, 후보 양주와 함께 수도 방위의 요충지로 기능하였다.

1505년(연산군 11) 좌보가 혁파되었다가 1511년(중종 6)에 복구되면서 목사가 부임하였다. 1566년(명종 21)에는 방어사(防禦使)를, 1573년(선조 6)에는 토포사(討捕使)를 겸하였으며, 1577년 광주목이 부로 승격되면서 부윤(府尹) 체제로 바뀌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에는 수어부사(守禦副使)를 겸하였고, 1623년(인조 1) 유수겸수어사(留守兼守禦使)로 승격되었다가 1630년 다시 부윤으로 복구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청군과 대치하여 남한산성에서 45일간 항전할 때 보부상들의 희생적인 보급로로 이용되는 등 국난 극복의 현장이 되기도 하였다. 1682년(숙종 8) 광주를 유수부로 삼았으며, 1750년(영조 26) 다시 유수겸방어사로 승격되었다가 1759년 부윤으로 환원되었으며, 1795년(정조 19)에 다시 유수겸방어사로 되는 등 변화를 겪었다.

18세기 중반 『여지도서(輿地圖書)』 「광주목」 편에 따르면 광주는 22개 면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그중 동부면과 서부면에 여러 개의 리가 존재한다[동부면: 사창리 · 산곡리 · 덕풍리 · 황산리 · 둔지리 · 팔당리, 서부면: 항동 · 춘장리 · 초덕리 · 감천리 · 동음암리]. 1836년(헌종 2) 서부면, 중부면 일부와 양주군 팔당리를 동부면에 편입하였다. 1895년(고종 32) 정부의 대대적인 지방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유수부에서 광주군이 되었으며, 이때 지금의 하남시는 광주군 동부면이 되었다.

1896년 광주군은 광주부로 승격하였다가 1906년(광무 10) 다시 광주군으로 환원되었다. 1907년 팔당리가 양주군에 편입되었으며, 1912년에는 동부면 · 서부면의 11개 리가 28개 동리로 확대 · 세분화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광주군청이 남한산성에서 경안읍(慶安邑)으로 이전하였고, 동부면은 신장리, 미사리, 풍산리 등 12개 리로 구획되었다.

1980년 12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동부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89년 1월 1일 광주시의 동부읍[12개 리]과 서부면[11개 리], 중부면 일부[상산곡리] 등 24개 법정리를 통합하여 10개 동을 관할하는 하남시를 설치하였다. 1994년 시청사가 덕풍동에서 신장동으로 이전하였으며, 신장택지개발사업에 따라 신장동, 천현동, 창우동의 행정구역이 조정되었다. 2008년에는 하남풍산택지개발사업으로 인하여 덕풍동 일원의 행정구역이 조정되었고, 2014년 6월 5일 미사강변도시택지개발사업에 따라 풍산동을 풍산동, 미사1동, 미사2동으로 분동하여 10개 동이 12개 동으로 늘어났다.

2015년 위례지구택지개발사업에 따라 감북동을 감북동과 위례동으로 분동하여 12개 동에서 13개 동으로 조정되었다. 특히 하남의 역사적 배경 등을 고려하여 새로이 분동되는 지역 명칭에 ‘위례’를 사용하였다. 2020년 4월 감북동이 분동[감북동, 감일동]되어 14개 행정동으로 개편되었으며, 하남감일공공주택지구 사업이 일어났다. 2023년 5월 행정동인 풍산동의 명칭을 미사3동으로 변경하였다.

유물 · 유적

선동과 미사동, 춘궁동 등에 신석기시대 유적지가 있고, 미사동과 덕풍동 등에 청동기시대 유적지가 있다. 미사동에서는 주거지와 빗살무늬토기가 나왔으며, 덕풍동에서는 돌도끼, 숫돌, 대팻날 등이 출토되었다.

사적으로 지정된 하남 미사리 유적(河南 渼沙里 遺蹟)[1979년 지정]은 신석기시대층, 청동기시대층, 삼국시대 초기층이 상하로 구분되어 나타나는 복합 유적이다. 신석기시대층에서는 빗살무늬토기, 어망추, 화살촉, 돌도끼 등 다량의 생활 도구와 탄화된 도토리가 출토되었으며, 청동기시대층에서는 무문토기와 함께 당시의 집터가 확인되었다.

불교 유적 가운데 춘궁동의 하남 동사지(河南 桐寺址)[1991년 지정]는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또 하남 동사지 오층석탑(河南 桐寺址 五層石塔)[1963년 지정], 하남 동사지 삼층석탑(河南 桐寺址 三層石塔)[1963년 지정], 하남 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河南 校山洞 磨崖藥師如來坐像)[1989년 지정]은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유교 유적 가운데 광주향교(廣州鄕校)[1983년 지정]는 경기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1993년 조선장(造船匠)이 경기도 무형문화재[지금의 경기도 무형유산]로 지정되었으나 2024년 4월에 지정 해제되었다.

사적으로 지정된 하남 이성산성(河南 二聖山城)[2000년 지정]은 하남시 춘궁동 일대의 산성 유적이다. 배후의 평야를 방어하고 한강 유역으로 진입하는 강북 세력을 견제하기에 유리한 입지에 자리한다. 성안에서는 8각 ·9각 · 장방형 등 다양한 건물지와 문지, 배수구 등 부대시설이 확인되었으며, 목간과 철제 마구 등 3,352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토기들은 경주 황룡사안압지 출토품과 유사한 양식으로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판명되어, 이 산성이 신라가 5세기 중엽 한강 유역을 점령한 이후 축조된 사실을 보여 준다. 이로써 역사적 ·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근대 건축 유적인 하남 구산성당[경기도 등록문화유산, 2023년 지정]은 가톨릭 건축물이다. 그 기원은 1839년(헌종 5) 서양인 선교사 모방(Maubant: 18031839) 신부와 김성우(金星禹: 17951841) 성인이 설립한 구산공소에 두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인 1956년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대지 1,660㎡[502평]를 매입하여 지금의 망월동 358-3번지에 성당을 건립하였으며, 약 10여 년 전 국내 최초로 레일 공법을 적용하여 현재의 위치로 약 200m 이전하였다.

교육 · 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광주향교가 있었다. 교산동에 있는 광주향교는 본래 고읍(古邑) 서쪽 2리쯤 되는 곳에 있었으나 1703년(숙종 29)에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그 밖에 상산곡동에 사충서원(四忠書院)이 있는데, 이는 1726년(영조 2)에 노량진[지금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 일대]에 세워졌던 것으로, 그 뒤 보광동으로 이전했다가 한국전쟁 때 파괴되어 1968년에 현재의 위치에 중건하였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34년에 동부소학교, 1936년에 서부소학교가 설립되었다. 그 뒤 점차 많은 학교들이 증가하여 2025년 7월 1일 기준 초등학교 24개, 중학교 13개, 고등학교 10개, 특수학교 1개가 있다.

민속 · 설화 · 민요

민속

하남시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로는 농기뺏기놀이가 있다. 이 놀이는 한강 이남 지역에서 성행하였으며, 특히 신장동의 농기뺏기놀이가 유명하다. 예로부터 농촌에서는 농악과 함께 농기를 세웠는데, 농기에는 한자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기폭과 꿩의 꽁지깃이 꽂혀 있었다. 각 마을은 이를 신성시하여 소중히 보관하였다. 농사일이 끝날 무렵, 신장동 장례마을(長禮마을)에서는 이웃 천현동 샘재마을과 함께 농기뺏기놀이가 펼쳐진다. 이들 마을 사이에는 시내가 흐르고 있어 시냇가 넓은 곳에서 놀이가 벌어지는데, 마을의 남녀노소가 모두 나와서 열띤 응원을 한다.

농악대가 마주 보고 서열에 따라 질서 있게 서로 절을 하는 데서부터 놀이가 시작되며, 절은 농기를 앞으로 굽히는 것이다. 이때 기를 덜 굽히면 더 굽히라고 상대방에게 소리치며 기세를 올리고, 굽히는 쪽에서는 더 못 굽힌다고 버틴다. 이처럼 서로 한참 동안 맞서다가 열기가 고조되면 결국 농기를 빼앗기 시작하는데, 수십 명의 장정이 달려들어 상대방의 깃대를 쓰러뜨리기 위해 수비와 공격을 하며 절정에 달하다가 급기야는 한쪽 편이 상대의 장목을 뽑음으로써 시합이 끝난다.

간혹 진 편에서 심술을 부려 석전(石戰)으로 번지기도 하지만, 마을의 원로들이 나서 만류하면 곧 진정된다. 시합이 끝난 뒤에는 농악대와 마을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춤추고, 술과 음식을 나누며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이 놀이는 농사철이 끝난 뒤의 피로를 풀기 위한 의미와 더불어, 이웃 마을 간 화목을 다지고 질서를 바로 세우려는 공동체적 목적을 지니고 있다.

동제로는 덕풍동 수리골마을[취곡마을(鷲谷마을)]의 산신제와 감이동 정림마을(靜林마을)의 정제(井祭)가 유명하다. 수리골마을의 산신제는 마을 뒷산에 있는 소나무와 오리나무숲을 신체로 하여 매년 정월 초순에 날을 택해 자정에 거행된다. 제물로는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바치고 조라술을 따로 마련한다. 제의(祭儀) 절차는 엄격한 관례에 따라 이루어진다. 제관은 상제관, 축관, 집사 등 여섯 명을 제일(祭日) 일주일 전에 선출하는데, 이들은 제일까지 목욕재계하고 근신해야 한다. 산신제가 끝나면 제물과 술과 고기를 나누어 음복하며, 제에 참여하지 못한 집에도 몫을 보내어 ‘이웃끼리 서로 돕는다’는 인보상조(隣保相助)의 정신을 기려 나간다.

또한 정림마을에서는 음력 7월 1일 밤 10시경에 마을 우물에서 정제를 지낸다. 제관은 동네 고령자 중에서 선출하는 것이 보통이며, 마을 유지들이 함께 참여한다. 제일 전에 우물을 말끔히 청소한 뒤 소 한 마리를 통째로 바치고 정성껏 제를 지낸다. 정제를 지내지 않으면 흰쥐나 구렁이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한 일이 생긴다고 믿어 예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날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일을 쉬고 함께 술과 고기를 나누며 친목을 다진다. 이 밖에도 창우동 작평마을(鵲坪마을)과 교산동 객산마을(客山마을), 그리고 초이동, 춘궁동에서도 산신제를 지낸다.

설화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인조(仁祖, 1595~1649)와 관련된 일화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을 떠났으나, 이미 적군의 선봉이 홍제원(弘濟院)에 이르고, 그 휘하 부대가 남하하여 양천강(陽川江)을 건너 왕의 길을 차단하였다. 이에 부득이 행선지를 남한산성으로 바꾸었다. 구리개를 지나 시구문을 나와 한강에 이르렀을 때, 갈대숲에 숨겨져 있던 작은 배 한 척을 발견하여 극소수의 인원만이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어둠이 내리는 가운데 송파(松坡)를 지나던 인조는 갑작스러운 도보로 지쳐 신하의 등에 업혀 갔으나 끝내 그 신하가 눈길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때 지게를 진 건장한 사내가 지나가자 신하가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하였다. 사내는 선뜻 인조를 등에 업고 순식간에 남한산성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는 산성 근처에 살며 나무를 팔아 생계를 잇던 서흔남(徐欣男)이었다. 얼마 뒤 인조가 그의 공을 치하하며 소원을 묻자, 서흔남은 잠시 망설이다가 눈부신 곤룡포가 마음에 든다며 그것을 받고 싶다고 하였다. 신하들이 꾸짖었으나, 인조는 생명의 은인에게 무엇인들 주지 못하겠느냐며 곤룡포를 벗어 주었다.

서흔남은 평생 그 곤룡포를 고이 간직하다가 죽을 때 함께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다. 사후에는 산성 남서쪽 병풍산에 장사 지내졌으며, 나라에서는 그의 공을 기려 별군관 벼슬을 내렸다. 또한 대소 관원이 그의 묘 앞을 지날 때에는 왕의 곤룡포가 함께 묻혔음을 존중하여 반드시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지나갔다고 전한다.

민요

이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민요는 다른 지방에서 흔히 불린 노동요인 남요(男謠)와 달리 부요(婦謠)와 동요만 전래되고 있다. 이 중 「사촌형님」은 부녀자의 애환이 담긴 것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형님 형님 사촌형님 / 반갑기는 하오마는 / 코아래 구녕이 무섭소 / 쌀 한되만 재쳤으면 / 형도 먹고 나도 먹고 / 구정물은 소가 먹고 / 누른밥은 개가 먹고…”라는 내용이며, 「서당앞에 비자낭근」은 “…당앞에 비자낭근 / 선비제위 흔들었네 / 냇가의 버들잎은 / 물살제위 흔들었네 / 칠팔월의 슨나락은 / 모끼제위 흔들었네….”

이 밖에 동요로 “…하날때 두날때 사마종날때 윤날거지 팔대장군 고두레뽕…”이라는 숨바꼭질 노래가 전해 내려온다.

산업 · 교통

산지가 전체 면적의 51.8%를 차지하며, 경지는 11.4%, 하천 11%, 대지 8.5%, 도로 6.1%로 구성된다. 100m 이하의 저산성 충적지가 발달하여 농업에 유리하였고, 과거에는 논농사가 많았으나 도시화와 공업화로 경지면적은 점차 감소하였다. 현재 경지 가운데 논은 0.13㎢, 밭은 3.53㎢이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을 비롯해 상추, 무, 배추, 호박, 오이, 고추, 파 등이 있으며, 특용작물로는 들깨와 참깨가 재배된다. 과실류로는 포도가 생산되고, 서울특별시 근교에 위치한 입지를 바탕으로 대도시를 대상으로 하는 근교농업이 발달하였다. 또한 산지가 많아 임산 자원으로 밤, 대추, 호두, 은행 등이 생산된다.

농가 인구는 전체 인구의 1.5%에 불과하며, 제조업 종사자는 전체 사업체 종사자의 13.4%를 차지한다. 과거에는 장석과 활석이 생산되었으나 노동력 부족으로 폐광되었고, 한때 비금속공업 · 조립금속공업 · 섬유공업 등이 발달하였다. 이 지역은 본래 서울에 인접한 경공업 도시이자 전원도시의 성격을 지녔으나, 이후 위성도시로 성장하였고 최근에는 위례 · 미사강변 신도시 개발과 함께 침상도시적 성격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상업 기반으로는 쇼핑센터 1곳과 대형마트 5개가 있으며, 전통시장으로는 상설장인 신장전통시장과 5일장인 덕풍전통시장이 운영되고 있다.

교통망을 살펴보면, 1987년 개통한 중부고속도로가 시 중앙을 서북–동남 방향으로 통과하며, 국도 43호선국도 45호선이 이를 따라 나란히 지난다. 1987년 준공한 수도권제1순환도로는 서남–동북 방향으로 이어지다가 시 중심부에서 중부고속도로와 만나 북쪽으로 경기도 구리시에 이르며, 서울특별시, 인천광역시, 경기도 북부와 연결된다. 또한 올림픽대로[강변도로]를 통해 서울 여의도인천국제공항, 김포국제공항 등으로의 접근성도 확보되어 있다.

1995년 팔당대교가 개통되면서 강원권과 직접 연결되었고, 이어 서울특별시 강동구 강일지구와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를 잇는 서울양양고속도로와 미사대교[2009년 완공]의 개통으로 춘천권 접근성도 크게 강화되었다. 시내 도로망은 일부 기성 시가지 구간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새롭게 구축되어 잘 정비되어 있다.

관광

서울특별시에 인접한 이 지역은 한강 유역의 충적지와 침식으로 형성된 해발 100m 이하의 저산성 산지가 발달하여 구릉성 지형을 이룬다. 과거에는 충적평야와 구릉 저지대에서 근교농업과 과수 재배가 활발하였으나, 서울의 급격한 도시 팽창으로 농경지가 주거지로 전환되면서 신흥 위성도시 가운데 인구증가율이 가장 높은 지역으로 성장하였다.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초기 철기시대, 초기국가시대, 백제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문화층이 확인되는 곳으로, 한 장소에서 시대별 유적이 중첩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백제 초기에는 몽촌토성이성산성이 협력하여 한강 유역을 방어한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유적 발굴 가능성이 높은 지역으로 평가된다.

하남 미사동에서는 약 5,000년 전의 선사 유적이 발굴되었다. 이곳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움집과 바깥화덕 자리, 빗살무늬토기, 돌도끼, 돌살촉, 어망추 등이 확인되었으며, 약 5,200년 전의 생활 도구로 판명되었다. 이러한 문화층은 서울 암사동 유적(서울 岩寺洞 遺蹟)과 같은 시기의 것으로 밝혀졌다.

관광 자원으로는 이성산성에서 내려다보이는 팔당댐한강의 뛰어난 조망이 대표적이다. 미사경정공원 조정카누경기장 인근 충적지에 자리한 미사동 선사 유적지도 주요 명소로 꼽힌다. 하남 유니온타워와 유니온파크는 노후화된 소각장과 재활용 선별장, 음식물 처리장의 기능을 통합 · 개선해 국내 최초로 지하에 폐기물 처리시설과 하수처리시설을 함께 설치한 환경기초시설이다. 이곳의 전망대에서는 한강과 검단산, 미사경정공원 조정카누경기장 등 하남의 경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단행본

『제18회 2008 하남시 기본통계』(하남시, 2008)
『지방행정구역요람 2000』(행정자치부, 2000)
『광주군지』(광주군지편찬위원회, 1990)
『한국관광자원총람』(한국관광공사, 1986)
『한국지지: 지방편 1(서울·인천·경기)』(건설부 국립지리원, 1984)
『우리고장의 문화재총람: 지정문화재편』(경기도, 1978)
『경기도지』(경기도지편찬위원회, 1957)

인터넷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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