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조사는 2차에 걸쳐 실시되었다. 1차 발굴에서는 조선시대의 수혈주거지(竪穴住居址) 6개, 고려시대의 고분 1기, 목조건물지(木造建物址) 1개, 적석유구(積石遺構) 2개와 용도를 알 수 없는 석렬유구(石列遺構)를 발굴하였다. 2차 발굴에서는 1개의 건물지가 조사되었다.
주거지의 평면상태는 원형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규모는 지름이 2∼3m, 수혈(竪穴)의 깊이가 20∼30cm, 넓이 5㎠ 내외로 작다.
주거지에는 특수한 형태의 난방시설이 있다. 제2호와 제3호 주거지 내부에는 석곽(石槨)과 유사한 소형 온돌시설이 있어 아궁이에서 불을 지피면 불길이 고래를 지나는 동안 주거지 내부의 공기를 덥히고 연기는 벽쪽에 만든 구멍을 통해 빠져나가도록 했다.
제2·3호 이외의 주거지에는 벽면에 높이 30cm, 너비 30cm 정도로 봇돌을 세우고 그 위에 이맛돌을 한 장 또는 두 장 올려 놓은 형태의 소형 아궁이시설이 있다.
조선시대 하층계급 사람들의 임시숙소로 추정된다. 주거지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은 백자류(白磁類)가 주류를 이루며, 굽의 형태나 태토(胎土)로 보아 16∼17세기경의 유물로 추정된다.
2개의 적석유구는 모두 구릉지 정상부의 바로 아래쪽 경사지에 위치하고 있다. 구조적인 형태는 모두 생토층(生土層)에 막돌[割石]을 한 단 또는 두 단을 깔아놓고, 그 주변에 수백여 점의 자기(磁器)를 깨뜨려 놓았다.
적석유구의 형태는 많이 파괴되어 있으나 대략 장방형이다. 수백여 점의 자기는 현장에서 인위적으로 깨뜨려 뿌려놓은 것으로 의례적(儀禮的)인 성격이 다분하다.
인접한 수혈주거지인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고려해 볼 때, 16∼17세기경에 만들어진 도공(陶工)이나 자기에 관련된 사람들의 제단(祭壇)으로 추정된다.
고분은 하나의 봉분(封墳) 안에 주된 토광(土壙) 1개와 소형 토광 2개가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토광 내부와 봉토(封土) 속에서 인위적으로 깨뜨려서 넣은 수십여 점의 사각호(四角壺)와 다른 토기들이 출토되었다.
이 유물들은 고려시대 유물로 추정된다. 고분 주변에서 출토된 와편(瓦片)도 통일신라에서 고려시대 전반기의 유물로 추정된다. 고분의 축조연대는 고려 중기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