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시 ()

계룡시청
계룡시청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충청남도 남동부에 위치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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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충청남도 남동부에 위치한 시.
개관

동쪽은 대전광역시 유성구와 서구, 서쪽과 남쪽은 논산시, 북쪽은 공주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7°12′~127°17′, 북위 36°13′~36°20′에 위치한다. 면적은 60.70㎢이고, 인구는 4만 1730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3개 면 1개 행정동(1개 법정동) 56개 행정리(18개 법정리)이 있다. 시청은 충청남도 계룡시 금암동에 있다.

자연환경

계룡시의 서부와 북부는 계룡산 줄기의 천황봉(845m) · 황적봉(664m) · 향적산(574m)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계룡산의 용화사 계곡에서 시작되는 두계천(豆溪川)이 시의 북동부를 흘러 갑천에 유입하고, 향적산에서 시작되는 연산천(連山川)이 시의 서부를 남북 방향으로 흐른다.

시의 동쪽과 서쪽은 남북으로 달리는 해발 약 500m 내외의 산릉으로 둘러싸여 있다. 남쪽은 개방되어 겨울의 한랭한 북서계절풍을 차단하므로 다소 따뜻하고, 수계(水系)가 조밀하여 물이 비교적 풍부하다.

흑운모 화강암의 심층풍화로 평탄면이 형성되었으며 여기에 취락이 발달했다. 특히, 신도안을 중심으로 발달한 산지와 하천은 풍수지리에서 일컫는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서 예로부터 길지(吉地)로 알려져 있다.

기후는 내륙분지에 위치해 한서의 차가 큰 전형적인 대륙성기후를 보인다. 연평균 기온은 11.6℃이며, 1월 평균기온은 –4.4℃, 8월 평균기온은 26.5℃이다. 연 강수량은 2013년에는 1,318㎜를 기록하였으며, 2011년에는 2,146㎜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역사

두계천을 중심으로 지석묘, 선돌, 청동기시대 주거지, 유구, 돌화살촉 등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신석기 후기 또는 청동기 시대의 계룡 지역 선사인은 지석묘 사회를 형성하고 입석신앙이 있으며, 마제석기를 이용한 아주 작은 규모의 농경과 수렵을 생업으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삼한시대의 마한에 속하여 논산 지방의 부족사회인 사노국과 진잠 지방 부족사회인 신흔국의 경계지역으로 어느 국에 속하였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부족사회의 일부에 속하는 작은 씨족마을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 근초고왕 때에 마한을 병합하면서 백제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에 속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황산군(黃山郡)으로 개칭되었고, 822년(헌덕왕 14) 김헌창의 난 때 장안국으로 잠시 귀속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하남도 웅주부 연산군에 속하였고, 이곳에 준 행정구역인 광소부곡(光炤部曲: 현 금암동)을 설치하였다. 1018년(현종 9)에는 공주목에 부속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고려를 멸망시킨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여 1393년(태조 2)에 신도읍지로 정해 1년여 간 대궐공사를 하였던 곳이다. 따라서 신도안이라는 지명과 그때 공사의 흔적인 계룡산 신도내 주초석석재, 신터리봉, 하천정비석축 등이 남아 있다. 계룡산 신도내 주초석석재는 1976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조선 초에는 연산현에 속하였다. 1646년(인조 24)에 류탁의 모반으로 인근 지역의 은진, 이산, 연산이 은진현으로 통합되면서 이곳에 속하였다. 1656년(효종 7)에 연산현으로 복치하였으며, 조선 말기에는 연산군 식한면 지역이었다.

1914년에 연산군 식한면 30개 리, 두마면 14개 리, 진잠군 하남면 우명리와 서면 월저리 일부가 병합되어 논산군 두마면으로 개편되었다. 1919년 독립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신도안이 새로운 도읍지라는 『정감록』의 예언을 믿는 사람들과 시천교 교인 2,000여 명이 신도안에 집단으로 이주해와 1924년에 신도안의 인구는 1,639가구 7,256명이 되었다.

1962년 5월 31일에는 두마면에 신도내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75년 8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국립공원 계룡산 자연정화정책으로 39개 단체가 강제 철거되기도 하였다. 그 당시 신도안 종교단체가 104개 단체로 종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1983년 6월 20일에 3군 본부 이전 재개발사업으로 신도내출장소가 폐지되었고, 1983년 8월 1일부터 1984년 6월 30일까지 신도안 5개 리 1,136세대 6,381명이 타 지역으로 이주되었다. 1989년 1월 1일에는 대전직할시 설치에 관한 법령에 의거하여 대덕군 진잠면 남선리가 논산군 두마면에 편입되어 남선출장소가 개소되었다.

1989년 7월에는 신도안 지역에 국방의 중추기능을 수행할 3군 본부인 계룡대가 이전되어 자주국방의 요람지로 변모되었다. 충청남도에서는 이곳에 급격히 증가되기 시작한 주민들에 대한 주택 · 문화 · 복지 등 양질의 행정서비스 제공과 문화와 전원이 보장되는 세계적인 계룡신도시 건설을 위해 1990년 2월 24일에 충청남도 계룡출장소를 개소하였다.

1991년 7월에 계룡신도시 종합건설 계획을 확정 · 추진하여 1993년에 계룡대 주거지원단지인 엄사지구 20만 평을 개발 완료하였다. 1995년에 왕대준공업단지 7만여 평을 조성하였으며, 1998년에 금암지구 신시가지 30만 평을 개발 완료하였다.

1996년 3월 1일에 논산군이 도농복합형태의 논산시로 승격되면서 논산시 두마면이 되었다. 1998년부터 계룡시 승격을 추진하여 2002년 4월 17일에 「충청남도 계룡시 도농복합 형태의 시설치 등에 관한 법률」이 2003년 6월 3일에 임시국회에서 입법 · 가결되었다.

2003년 7월 18일에 공포되고, 2003년 9월 19일에 자치단체인 계룡시로 출범하게 되어 두마면 · 남선면 · 금암동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었다. 2006년 3월 20일에 두마면은 두마면과 엄사면으로 분리되었고, 2009년 5월 21일에 남선면은 신도안면(新都案面)으로 개칭되었다.

유물 · 유적

신도안면 일대에 흩어져 있는 계룡산 신도내 주초석 석재는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궁궐 축조 때 주춧돌로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두마면 두계리에 있는 계룡 사계 고택(충청남도 기념물, 2013년 지정)은 조선 중기 때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이 낙향하여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양성하던 곳이다.

계룡산 신도 내주초석석재는 신도안면 부남리 대궐터 앞에 흩어져 있는 큰 바위들로서 현재 모두 115개가 남아 있으며, 거의 1.4∼2m의 암석들이다. 지방민의 사유화를 막기 위하여 1976년 6월 9일에 유형문화재로 지정하였고, 현재는 한곳에 모아 국방부에서 관리하고 있다.

사계고택은 사계 김장생이 계축옥사(癸丑獄事)로 낙향하여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등 많은 후진을 양성하며 말년을 보낸 곳이다. 현재는 사랑채만 원형이 보존되고 다른 건물들은 중간에 개 · 보수를 하였다. 구례실에 위치한다. 정원이 아름답고 넓은 광산김씨 종가집으로 고풍스러우며 오래된 각종 나무들이 있다.

또 두마면 왕대리의 모원재와 두마 신원재, 금암동의 염선재와 이심원 충신정려 현판 등이 있다. 모원재는 1989년, 신원재는 2002년, 염선재는 1990년, 심원 충신정려 현판은 1995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모원재는 의정공 김국광(金國光, 1415∼1480) 묘소를 조성한 후 건립된 재실이다. 최초 건립된 건물 연대는 기록으로 전하는 것이 없으며, 1867년(고종 4)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옥으로 된 이 건물은 조선조 건물양식으로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다.

건물 2칸은 대청을 만들었고 대청 웃마루에는 다락마루를 두고 있다. 또 2칸은 방으로 만들고 방과 대청 사이에는 벽 전체를 문으로 설치하여 그 문을 열리게 함으로써 대청과 방을 통간으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팔각지붕으로 된 이 재실은 전면 툇간은 우물마루를 설치하였다.

신원재는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과 그 형제들이 1632년(인조 10)에 건립하여 김집 사후에 그의 막내 동생 김비가 황강행장(黃岡行狀) 및 실기(實記), 사계 · 신독재 전서 등을 정리 · 집필하였던 유서 깊은 곳으로, 건물은 조선 중기의 전통 한식 목조 와가로 되어 있다. 염선재는 원래 작은 제각이었으나 1913년에 현재의 건물로 증축되어 조선 말 전통 가옥 형태를 잘 보존하고 있다.

이심원 충신정려 현판은 정면 2칸, 측면 1칸 규모이며 철책으로 보호되고 있다. 기단은 막돌을 사용하여 1단을 구축하였으며 그 위에 원형의 주초석을 놓고 원주를 세웠다. 4면은 홍살로 처리하였으며 하방과 중방을 시설하였다. 가구양식은 도리식을 이용했고, 처마는 겹처마이다. 측면의 박공널 밑에는 방풍판을 설치하여 정려를 보호하고 있다. 정려의 내부에는 명정 현판과 함께 중수기가 있다.

교육 · 문화

교육기관은 2015년 현재 초등학교 5개교, 중학교 3개교, 고등학교 2개교가 있다.

민속

계룡시의 백중놀이는 1494년(성종 25)부터 두마면 왕대리에서 전승해오던 놀이로, 3년마다 음력 7월 15일 백중일을 기하여 백년대길과 세화연풍을 기원하던 두레싸움 성격의 민속놀이이다.

조선 성종 때부터 좌의정을 지낸 서석 김국광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묘역이 있는 두마면 왕대리와 인근 27개 동리 사람들이 농사일이 거의 끝나는 음력 7월 15일 백중일에 김국광의 묘에 참배한 후 인근 두계천변에 모여 난장판을 벌리고 한마당 축제로 벌였던 민속놀이이다.

1942년까지 전승되어왔던 이 놀이는 그 후 40여 년간 중단되었다가 마을 원로들의 고증을 거쳐 1989년에 충청남도국악협회 충남지부 김용근이 재발굴한 것으로, 협동과 근면정신을 일깨우고 권선징악과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농민들의 한마당 놀이이다. 현재 논산시 연산면에서 주관하는 연산 백중놀이가 되었으나 원래 명칭은 왕대리 백중놀이이다.

두마면 왕대1리(왕대) 총좌상을 비롯하여 왕대2리(은동) · 두계1리(팥거리) · 두계2리(구로실) · 입암(선바위) 등 4개 동리에서 지역 좌상 1명씩이 인솔하여 음력 7월 15일 백중일에 동리 표시기, 영기, 용기, 농기, 오방기, 장나팔, 태평소 등의 순서로 하여 총좌상의 동리인 왕대리에 집결한다.

이때 기수와 풍장군들은 전립을 쓰고 농악을 치며, 농군들은 호미 · 삽 · 낫 등의 농기구를 휴대하고 동리마다 짚 3단씩을 지게에 짊어지고 청황 등을 든다. 아낙네들은 농신제에 쓰일 떡과 제물을 들고 각 지역 좌상들을 따라 간다. 총좌상기는 쌍용이 그려져 있고 지역 좌상기는 한 마리 용이 그려져 있는데, 지역 좌상기는 총좌상기인 쌍용기 앞에 동리별로 정렬한다.

지역 용기는 공원의 구령에 따라 순서대로 쌍용기에게 두 번씩 절을 한다. 쌍용기는 상견례의 답례로서 지역 용기 장목에다 백색의 긴 수건을 달아준다. 이와 같이 상견례 의식이 끝나면 신장대 모양으로 만든 농신대에다 오곡 주머니 4개를 묶고 짚단을 한데 모아 세우고 외약 새끼줄로 묶은 다음 집둥체의 상 중앙에 농신대를 꽂는다. 이때 아낙네들은 준비한 제물로 제상을 차려 놓는다.

쌍용기를 비롯한 각종 기를 병풍식으로 둘러 세우고 지역좌상들이 제관이 되어 축문을 낭독하며 농신제를 지낸다. 연산 백중놀이는 이때에 하던 놀이로 두마면 왕대리를 중심으로 연산면 일대에서 전승되어온 민속놀이이다. 이 놀이는 내용이 다양하고 다른 지방의 백중놀이와 달라서 향토사적 측면에서도 아주 좋은 놀이이다.

금암동 노제는 광수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정월 초사흘이면 마을 입구의 노목 앞에서 거리제를 행함으로써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한다. 관제의 선출은 제일과 생기복덕이 맞는 사람으로 선출하는데 제관, 축관, 유사 각 2명씩 6명을 뽑는다. 이들은 거리제를 지내기 위해 금기를 행하며 마을의 공동 우물을 깨끗하게 품는다.

거리제에 올려지는 제물은 준비에 온갖 정성을 기울인다. 제물의 구입과 함께 제에 사용되는 비용은 호당 거출된 금액으로 충당한다. 거리제는 초사흘 저녁 8시경 마을의 공동 우물에 샘고사를 지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샘고사는 풍물과 함께 지내고 있으며, 물로부터 전해지는 질병이 없기를 기원한다.

샘고사가 끝나면 제관과 마을 주민은 곧바로 제장인 마을 입구의 노목 앞으로 행진한다. 이때 풍물은 제를 치르는 일행을 선도하며 거리제의 시작을 알린다. 제장에 도착하면 풍물은 더욱 흥을 돋우고 제관은 제물을 진설한다. 제는 제물진설, 분향, 헌작, 독축, 소지의 순서로 진행되며, 소지는 호당 소지를 여럿이 나누어 동시에 올린다.

제가 끝나면 다시 풍물이 울리고 제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마을회관으로 발길을 옮긴다. 마을회관에서는 거리제를 올린 제물로 음복하면서 한 해의 마을 일에 대한 동계를 한다. 요컨대, 금암동의 거리제는 샘고사와 복합되어 마을의 질병을 막고 평안을 기원하며 아울러 한 해 농사의 풍농을 비는 제이다.

광석리 산신제는 해마다 음력 정월 열나흘에 행하고 있으며, 산제당은 마을 뒷산 서편 중턱에 있다. 산신제를 주관하는 제관은 대체로 전년도 동계에서 다음 해의 제일에 맞추어 생기복덕으로 선출한다. 여기에는 제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제관, 제관을 도와 축을 읽는 축관, 제물의 준비를 담당하는 유사 등 각각 1인을 뽑는다.

제관, 축관, 유사로 선출된 사람은 산신제를 거행함에 있어 정월 초사흘부터 제일인 정월 열나흘까지 금기한다. 예컨대, 제관 일행은 목욕재계와 함께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부정한 것은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는다. 아울러 이들의 집에는 왼새끼로 꼬아서 만든 금줄을 치고 집 앞에는 황토를 뿌려 악귀의 출입을 막는다.

제관은 마을 뒷산에 마련된 산신당을 정성껏 깨끗하게 청소한다. 유사는 제물을 준비함에 있어 제물의 신선도와 모양에 정성을 들일 뿐만 아니라, 제물을 구입하는 상점도 깨끗하고 부정이 없는 집으로 선택하고 있다.

산신제에 올려지는 제물로는 소머리(생것), 술(유사의 집에서 빚은 곡주를 사용함), 삼색 실과, 시루떡, 메밥 등이 있다. 제물의 준비와 함께 제에 사용되는 비용은 동계에서 보조되는 기금과 소지대금으로 충당하는데, 대체로 동계에서는 쌀로 1가마 반을 내놓으며, 소지대금으로는 약간의 돈을 걷는다.

산신제는 정월 열나흘날 밤 자시에 행하며 제는 제물진설, 초헌, 독축, 아헌, 소지의 순서로 진행된다. 이때 초헌은 상소임인 제관이 올리며, 아헌시에는 두 잔의 술을 올린다. 소지는 각 개인별로 올리는데 개개인의 무병과 평안을 빌며, 아울러 마을에도 평안이 계속되기를 기원한다. 제가 끝나면 제관 일행은 휴식을 취했다가 유사의 집에 모여 음복을 하며 동계를 한다.

설화 · 민요

금암동에 금암(암소바위)이라고 부르는 바위가 있는데, 옛날에는 연산군 두마면에 속한 지역이었다. 금암동 천마산 중턱에 집채만한 바위가 있다. 큰 바위가 한 가운데를 칼로 갈라놓은 것과 같이 잘려져 있는데 이 바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고려 중기 수차례에 걸친 외세의 침략으로 국가기강이 혼란한 틈을 타서 승려들까지 난동을 부리는 일이 있었다.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에서 고려 태조 왕건은 하늘의 도움을 받아 백제 신검을 물리치고 고려를 창건함에 따라 고려의 국운을 크게 연다는 뜻의 개태사라는 절을 지었다.

이로써 승리의 기념과 국운 융창을 빌게 하고, 산남지방의 유사시 병력으로 활용하기 위해 개태사에 수천 명의 승려를 두었다. 국력은 날로 어지러워지고 개태사의 세력은 강성해지자,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승려들이 작당하여 인근 촌가를 습격 · 약탈하는 등 횡포가 날로 심하였다.

개태사의 횡포로 인근 주민들이 살 수가 없게 되니, 왕이 크게 근심하여 개태사를 칠 계획을 논의하게 되었다. 이때 한 장수가 지원하였으니, 바로 최일장군이었다. 최일장군은 왕명을 받고 군사를 거느리고 연산 개태사 부근에 이르러보니 안개가 자욱하여 싸움을 할 수 없어 퇴각하여 30여리 떨어진 노성 방면에 진을 쳤다.

어느 날 최일장군이 말을 타고 개태사를 향하여 가던 중에 있었다. 금암리 앞에 이르니 한 농부가 검은 암소로 논을 갈면서 “이 놈의 미련한 소야! 최일장군만큼이나 미련하고 어두운 소이구나!”라고 하며 논을 갈고 있었다. 이 소리를 들은 최일장군은 말에서 내려 논을 가는 농부에게 물었다. “여보시오. 내가 바로 최일장군인데 어찌해서 소를 보고 나같이 미련하다고 합니까?”라고 하였다.

농부는 깜짝 놀라며 “아 당신이 최일장군이십니까? 미안합니다. 장군께서 아무리 개태사를 치려고 하나 저 천마산 중턱에 있는 암소바위가 개태사를 보호하고 있어 이 절을 치려하면 안개가 끼게 하여 절을 보호하니, 암소바위를 칼로 내려 친 다음 개태사를 치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라고 하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후 금암리 천마산에 올라가니 과연 집채만한 바위가 있었다. 최일장군이 장검을 빼어 암소바위 한복판을 내려치니 바위가 갈라지면서 피가 주르르 흘렀다. 최일장군이 군대를 휘동하여 개태사에 이르니 거짓말처럼 연일 끼어있던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최일장군은 일격에 개태사 승려들을 토벌하여 인근 주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하였다.

이밖에도 신도안에 새 도읍지라는 예언과 관련된 여러 가지 전설들이 전해오고 있으며, 선바위 · 도곡리의 장자동 · 암용추와 숫용추 · 사랑의 쌀바위 · 만운사와 규수 등의 지역전설이 있다.

산업 · 교통

계룡산 동남쪽의 구릉에 위치해 임야가 전체면적의 65.83%를 차지하며, 농경지는 13.62%밖에 되지 않는다. 총경지 면적 8.04㎢ 중 논이 4.86㎢, 밭이 3.18㎢로 논이 조금 더 많다. 주요 농작물은 주곡인 쌀 외에 딸기, 상추 등 약간의 채소류가 재배된다. 농가별 경지규모는 거의 1㏊ 미만이다.

산업별 종사자를 중심으로 산업구조를 살펴보면, 1차 산업 종사자가 16%, 2차 산업 종사자가 2%, 3차 산업 종사자가 82%로 지나친 불균형을 보이고 있다. 이는 3군 본부인 계룡대가 이전함에 따라 많은 군인 인구가 유입된 것과 관련이 있는데, 특히 숙박 · 음식업소가 많고 도소매업 · 수리업 등 서비스업이 발달했다.

교통은 대전∼논산 간의 1번 국도가 지나고 있고, 호남고속국도지선에 계룡 나들목이 개설되어 있어 대전 · 논산 · 공주 방면으로의 도로교통이 모두 편리하다. 호남선이 지나면서 계룡역이 설치되어 있어 철도교통 또한 편리하다.

관광}

주요 관광지로는 산봉우리가 줄지어 날카롭게 솟아 있고 뛰어난 경치를 이루고 있는 충청남도의 대표적 명산인 계룡산국립공원이 있다. 이밖에 신도안면 용동리의 괴목정(槐木亭)과 숫용추, 신도안면 부남리의 암용추 등이 있다. 1983년부터 계룡산(鷄龍山) 기슭에 건설된 육 · 해 · 공 3군 통합 신기지(新基地)인 계룡대는 36m 높이의 통일탑을 비롯하여 주변에 전투기 · 전차 등의 무기를 전시해 내방객들에게 안보의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읍 · 면
  1. 두마면(豆磨面)

시의 남부에 위치한 면으로 면 소재지는 두계리이다. 면적은 12.51㎢이고, 인구는 7,470명(2013년 기준)이다. 원래 연산현 지역으로, 1914년에 논산군 두마면이 되었다. 2003년에 면 전체가 계룡시로 승격하면서 편입되었고, 2006년 3월 20일에 광석 · 도곡 · 엄사 · 유동 · 향한리가 엄사면으로 분리되었다.

서쪽은 천마산과 천호봉을 잇는 능선이 논산시와 경계를 이루며, 동쪽은 두계천(豆溪川)을 경계로 대전광역시와 접한다. 국가유산으로는 왕대리에 사계 고택, 모원재, 신원재가 있다. 농소리(農所) · 두계리(豆溪) · 왕대리(旺垈) · 입암리(立巖) 등 4개 리가 있다.

  1. 엄사면(奄寺面)

시의 중부에 위치한 면으로 면 소재지는 엄사리이다. 면적은 17.91㎢이고, 인구는 1만 7932명(2015년 현재)이다. 원래 두마면 지역으로, 2006년 3월 20일에 광석리(光石里) · 도곡리(道谷里) · 엄사리(奄寺里) · 유동리(柳洞里) · 향한리(香汗里) 등 5개 리가 엄사면으로 승격되면서 두마면에서 분리되었다.

엄사도시개발로 인하여 도시와 농촌이 어우러진 도농복합지역을 형성하게 되었다. 유동리를 중심으로 계룡시민체육관, 계룡문화예술의 전당 등 문화 · 체육시설이 건립되어 있다. 민속행사로 매년 음력 1월 14일에 광석리 · 향한리 산신제와 도곡리 거리제가 열린다.

  1. 신도안면(新都案面)

시의 북부에 위치한 면으로 면 소재지는 남선리이다. 면적은 27.40㎢이고, 인구는 7,433명(2015년 기준)이다. 원래 두마면 지역으로 1989년 1월에 대덕군 진잠면 남선리(南仙里)가 편입되었고, 군인가족에 대한 행정 편의 지원을 위해 두마면 남선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89년 7월에 육군본부와 공군본부가 입주하면서 1990년 2월에 충청남도 계룡출장소가 설치됨에 따라 계룡출장소 남선지소로 변경되었고, 「충청남도계룡시도농복합형태의시설치등에관한법률」에 따라 2003년 9월 19일에 계룡출장소가 시로 승격되면서 계룡시 남선면이 설치되었다. 2009년 5월 21일에 남선면이 신도안면으로 개칭되었다.

신라 5악(五嶽)의 하나이자 조선시대 3악의 하나로 유명한 계룡산(鷄龍山) 동남쪽 구릉에 위치해 임야가 많고, 상대적으로 농경지는 적다. 조선 초기 천도(遷都) 후보지로 꼽힐 만큼 길지(吉地)로 주목받아 예부터 민간신앙을 비롯한 각종 종교 집단이 모여들어 부남리 · 석계리 · 용동리 일대를 중심으로 특수취락을 이루었다. 그러나 현재는 주민 대부분이 타지에서 이주해 온 유입민들로 이루어져 있다.

농작물은 쌀을 비롯한 주곡(主穀) 외에 특용작물인 인삼 · 잎담배 등이 재배된다. 또 이 지역에는 1993년까지 육군 · 공군 · 해군의 3군 본부인 계룡대(鷄龍臺)가 들어서 계룡대 쇼핑타운을 비롯해 스포츠랜드 · 복지센터 등 대형 시설이 입지해 각종 서비스업이 발달하였다.

남선리(南仙里) · 부남리(夫南里) · 석계리(石溪里) · 용동리(龍洞里) · 정장리(丁壯里) 등 5개 리가 있다.

  1. 금암동(金巖洞)

시의 중부에 위치한 동이다. 계룡시청이 위치하여 행정 중심지를 이룬다. 면적은 2.88㎢이고, 인구는 8,895명(2015년 기준)이다. 원래 두마면 금암리 지역으로, 2003년 9월 19일에 계룡출장소가 시로 승격되면서 계룡시 금암동이 설치되었다.

민속행사로는 금암동 광수마을에서는 음력 정월 초사흘에 열리는 거리제가 있다. 국가유산으로는 염선재와 이심원 충신정려 현판 등이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대동지지(大東地志)』
『택리지(擇里志)』
『2014년 계룡시통계연보』(계룡시, 2014)
『지방행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0)
『한국지리』지방편(권혁재, 법문사, 1996)
『우리고장 충남』환경과 역사(충청남도 교육위원회, 1986)
『한국지지』지방편Ⅱ(건설부국립지리원, 1984)
『충남의 맥락』(충청남도, 1983)
『한국의 발견』충청남도(뿌리깊은나무, 1983)
『한국지명요람』(건설부국립지리원, 1983)
『한국지지』총론(건설부국립지리원, 1983)
『한국민속대관』(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1980)
『충청남도지』(충청남도지편찬위원회, 1979)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 충남편』(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1976)
『충남의 관광자원』(충청남도관광협회, 1966)
『조선각도읍지』(박문사, 1929)
『충남산업지』(대전실업협회, 1921)
계룡시(www.gyeryong.go.kr)
논산계룡교육지원청(www.cnnse.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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