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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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
1945년 이후, 한국 교회의 완전한 재건을 기치로 기성의 장로교에서 분립하여 새로 조직한 교단 교회.
단체
설립 시기
1946년
설립자
남한재건교회-최덕지, 북한재건교회-김린희
설립지
경남 동래군 대변리, 평안북도 선천
소재지
대한민국 전 지역(서울, 부산, 경남 지역에 집중)
발간지
코이노니아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재건교회는 1945년 이후, 한국 교회의 완전한 재건을 기치로 기성의 장로교에서 분립하여 새로 조직한 교단 교회이다. 해방 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하다 출옥한 지도자들 사이에서 교회 재건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자, 일부 전도사 중심의 지도자들이 재건교회를 창립하였다. 북한에서는 김린희, 박신근, 고흥봉이, 남한에서는 최덕지가 재건교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일부가 기성교회로 돌아갔고, 1989년 모든 재건교회가 통합되어 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 재건총회(예장 재건)라는 이름으로 단일화되었다.

정의
1945년 이후, 한국 교회의 완전한 재건을 기치로 기성의 장로교에서 분립하여 새로 조직한 교단 교회.
설립 목적

재건교회(再建敎會)는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에 굴복한 한국 교회성경과 10계명을 어겨 그 본질을 훼손했다고 판단하고, 한국 교회의 완전한 재건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변천 및 현황

1945년 7월 일본 기독교 조선 교단으로 통폐합되었던 개신교는 해방 후 남부 대회를 열어 통합을 유지하고자 하였으나, 각 교파 교회의 반대에 부딪혀 1946년 5월 각 교파 교회로의 환원을 결정하였다. 한편 일제하 신사참배 문제로 옥고를 치르고 해방 이후에 석방된 사람들은 교회의 5대 재건 원칙을 발표했지만,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기성 교회를 부인하고 새로운 교회를 조직하였다. 남한에서는 최덕지, 강상은, 김영숙 등을 중심으로 1946년 2월 재건교회 설립 운동을 시작해 경상남도 지역에 50여 개의 재건교회가 조직되었다. 그리하여 1948년 2월 경상남도 동래군(현, 부산광역시) 대변리에 주1 장로회 재건교회 중앙위원회를 조직하고 부산, 경상남도 지역에 50여 개의 재건교회로 발전시켰다.

이들은 재건운동의 원칙으로 3대 주의 5대 강령을 채택하면서 기성 교회를 ‘마귀당’이라고 부르며, 기성 교회 성도와의 만남과 교제도 ‘동참죄’라는 이름으로 절교하는 등 지나치게 원론적인 금욕 생활을 강조하였다. 3대 주의는 ‘여호와께만 충성하자’, ‘철두철미 회개하자’, '깨끗한 성전을 지어 바치자'이며 5대 강령은 ‘한국교회는 완전 재건하자’, ‘마귀당은 일절 버리자’, ‘불의와 위선에는 절교하자’, ‘우상은 일절 타파하자’, '너도나도 재건운동자가 되자'였다.

1949년에는 교단 명칭에서 ‘장로교’를 삭제하여 문호를 개방한다는 취지에서, 1952년 예수교 재건교회 남한지방회로 변경하였다. 그리고 1951년 최덕지를 명예 여목사로 세웠다. 그러나 1953년 8월 여자 목사 안수에 반대하여 주상수, 최일구 등이 따로 분립하는 가운데, 최덕지는 1954년 정식 목사 안수를 받고 교단을 이끌다가 1956년 사망하고, 이후 강상은, 최종규, 박성규, 김영숙, 박은수, 조광제 등이 교단을 지도하였다. 남한 재건교회 교단은 1959년 9월 동부지방회, 중부지방회, 서부지방회를 조직하였고 독자적으로 대한예수교 재건교회 총회를 창립하였다. 이후에는 다른 재건교회와 구별하며 통칭 부산노회로 활동하였다.

북한에서는 1946년 4월 선천에서 출옥한 성도 중 김린희, 박신근, 고흥봉 등을 중심으로 북한 재건교회가 조직되었다. 3대 권위와 4대 성별을 기치로 북한 지역에서 날로 성장하다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위기를 맞았다. 3대 권위는 교회, 예배, 성경의 권위를 말하고 4대 성별은 신앙, 성전, 혼인, 주일의 권위를 말한다.

남북 분단 이후 김린희는 1947년 월남하여 서울에서 태평로 재건교회를 중심으로 재건교회운동을 계속하다가 1950년 6·25전쟁 중 주2되었다. 이후 고흥봉 목사가 월남한 교역자들을 중심으로 부산에서 영주동 연합재건교회를 중심으로 재건운동을 이어가다가 1951년 유일한 목사였던 고흥봉 목사 외 신학생 13명을 이끌고 고려신학교로 이탈하여 분열되었다. 남은 북한 재건교회에는 195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경상남도 거제도로 월남한 이계실 목사가 합류했지만, 이계실 목사 계열도 1955년 대한예수교 순장로회를 조직하면서 분립하였다. 기존 북한 재건교회는 1958년 12월 주상수 계열의 재건교회와 통합하여 부산 영주동교회에서 예수교 재건교회 대회를 조직하고 1962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재건노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다시 1964년 2월 외국 선교사와 기성 교회와의 관계에서 좀 더 유연한 입장을 취하던 김문제 목사 계열이 분립하였다. 이들은 한국장로회 재건교회라는 명칭으로 독자적인 활동을 하다가 1970년대 후반 장로교단으로 흡수되었다.

1974년 7월 북한에서 월남한 재건교회인 김린희계, 이후 전봉성 계열의 대한예수교장로회 재건노회와 남한의 재건교회의 주류였던 최덕지 계열의 대한예수교 재건 총회가 통합하기로 합의하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재건교회 총회를 창립하였다. 통합 당시의 교세는 노회 2개(서울노회, 부산노회), 교역자 목사 33명, 전도사 40명, 장로 70명, 교인 수 12,000명이었다. 하지만 두 노회는 여전히 여 성직 임명 등을 두고 서먹한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독자적인 신학교를 운영하면서 완전한 통합은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처럼 통합운동을 이루는 과정 중에도 기존 북한 재건교회 계통 대한예수교장로회 재건노회에서 주상수, 최일구 계열이 이탈하여 ‘재건노회’를 남한 재건교회인 대한예수교재건 총회에서 강상은 계열이 이탈하여 ‘중부노회’를 따로 두었지만, 1989년 5월 16일 재건이라 이름하는 모든 교회 ,모든 노회, 모든 총회가 하나로 통합되어 ‘대한예수교장로회 재건총회’로 새롭게 출발하였다. 통합 당시에는 전국 약 150여 교회, 20,000여 명에 이르는 성도 규모의 교단이었다.

완전 통합 직전 1988년 4월에는 각 노회(서울, 부산, 재건)에서 운영하던 신학교를 통합하여 서울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재건총회신학교를 세웠다. 하지만 학생 교류나 교사(校舍)의 확보, 교수진 구성에서 난항을 겪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신학교 건립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전도사를 배양하기 위한 신학교가 아닌 명실상부 신대원에 준하는 총회 신학원을 설립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1990년대 이후에는 박재준, 박성규, 최종규, 박은수 목사 등이 원로급 지도자들도 통합 이후의 신학교 설립과 교세 확장을 우선적인 과제로 인식하고 일련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이처럼 재건교회 총회신학교 설립을 위해 노력하던 중 재건중앙교회에 재건신학교를 두고 성경학교에서 발전된 신학교 과정으로 학력과 무관한 전도사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운영하였다. 독립적인 교사(校舍)를 마련하지 못하고 재건 중앙교회(삼성동 소재) 부속 건물을 빌려 사용하다가 사정상 재건부산교회(부산 수정동 소재)로 내려갔다가 다시 중앙교회로 올라오는 등 주3을 거듭하였다. 단독 신학교의 필요성을 느끼고 전국 교회와 교인들의 헌금을 토대로 2013년 12월 천안 근교에 부지를 마련하여 교사와 기숙사 부속 건물을 짓고 본격적인 신대원 형식의 교육과정을 도입하여 재건총회 신학원을 출범시켰다. 초대 신학원장으로 마산재건교회를 담임하는 양영전 목사를, 전임교수 겸 교무처장으로 김영호 목사를 두었다.

교세 확장과 단합을 위하여 전국 재건교회 성가 합창제, 성직자 재교육, 전국 재건교회 장로회 발족시켰으며, 고신교단과의 교류, 유학생 파견 등을 실시하여 외연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역사편찬위원회를 두어 교단 역사 자료를 수집하고 ‘역사의 증인’이란 이름의 증언록이나 자료를 수집 정리하였다. 하지만 재건교회의 보수성과 폐쇄성으로 인하여 기성의 장로교단으로부터 배척을 당하기도 하고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결국엔 신학교도 설립하고 교단 문호도 개방하였지만 ‘신앙하기 어려운 교회’, '현실감과 사랑 없는 교회'라는 인식과 교육의 부재 등으로 전도의 어려움이 이어졌고, 교세는 점차 위축되었다. 아울러 시대적 흐름도 영향을 미쳤지만, 목회자의 부족, 재정 자립의 약화로 인하여 2023년 기준 전국 약 120여 개의 교회, 10,000여 명이 채 안 되는 신자, 90여 명의 목사, 서울노회, 부산노회, 영남노회, 서부노회, 동부노회의 5개 노회 규모의 군소 교단으로 축소되었다. 한때 순수한 신앙을 내세우며 한국 개신교 최초로 여목사를 세우는 등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교단이었지만, 점차 주5을 인정하는 다른 교단들의 추세에 비하여 오히려 통합 이후에는 여성직자나 여장로를 세우지 않는 등 시대에 역행하는 행정을 이어가고 있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참고문헌

단행본

기독교문사, 『기독교대연감』 (기독교문사, 1990)
김정일, 『한국기독교 재건교회사』 1 (여울목, 2016)
김정일, 『한국기독교 재건교회사』 2 (여울목, 2018)
재건교회총회 역사편찬위원회, 『역사의 증언』 1~3 (재건교회총회 출판부, 1983)
최훈, 『한국교회 박해사』 (예수교문서선교회, 1979)
한국종교사회연구회, 『한국종교연감』 (고려한림원, 1993)

기타 자료

「장로교총회 23회 총회록」(1934)
「조선예수교장로교회 경남노회 뎨 38회 회록」(1936)
「제1회~10회 전국교역자대회 회의록」(재건교회총회, 1948-1957)
「재건교회총회공문서철」(재건교회총회, 1950-1968)
「예수교재건교회 제6회 중앙위원회 공문서철」(재건교회총회, 1951)
「예수교재건교회 제1회 남한지방회 문서철」(예수교재건교회 남한지방회총회, 1952)
주석
주1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교훈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 천지 만물을 창조한 유일신을 섬기고,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다.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고, 다시 페르시아ㆍ인도ㆍ중국 등지에 전해졌다. 11세기에 그리스 정교회가 갈려 나갔고, 16세기 종교 개혁으로 로마 가톨릭교회는 구교인 가톨릭교와 신교로 분리되어 현재 세 교회로 나뉘어 있다. 우리말샘

주2

북한으로 납치해 감. 우리말샘

주3

세력 따위가 성하고 쇠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4

이리저리 흩어져서 질서나 체계가 서지 아니함. 또는 그런 상태. 우리말샘

주5

여당과 여당을 지지하는 세력 안에 드는 사람이나 단체.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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