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2년(고종 9)에 전시(殿試)에 합격하고, 이듬해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 1876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을 지냈다. 이상재(李商在) · 서재필(徐載弼) 등과 함께 독립협회에서 활약하였는데, 1897년에는 독립협회 제4대 임원 구성에서 평의원을 맡았다.
1898년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가 열리자 청년 연사로 이승만(李承晩)과 함께 당시의 한로은행(韓露銀行) 내막을 폭로하고 재정 고문과 군사 교관의 부당성을 지적, 규탄하는 연설을 하여 여론을 일으켰다. 그 뒤 황국협회(皇國協會)와 충돌하여 한때 투옥되기도 하였으며, 중추원 관제개혁 때는 독립협회 대표의 한 사람으로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