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평(海平). 사과 윤승구(尹升求)의 아들이다.
189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파격적으로 16일 만에 수찬·부교리에 임명되었다.
그 뒤 독립협회운동, 특히 1898년 이후 윤치호(尹致昊) 등이 협회를 주도하여 활발하게 민권운동을 하던 시기에 적극 참여하여 총대위원(總代委員) 등으로 선출되어 의회설립운동을 하였다. 그해 11월 4일 중추원의관선출을 하루 앞두고 수구파 조병식(趙秉式) 등이 독립협회회원들이 공화정치를 하려 한다고 고종을 속여 윤하영을 포함한 중요회원 17명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만민공동회의 시위로 그들을 석방하였고, 중추원의관도 임명하였는데 윤하영도 그 중에 포함되었다. 중추원의관들이 정부 대신 후보자 11명을 선출하는 데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역적의 혐의를 받고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朴泳孝)를 소환하여 법부에서 박영효의 죄의 유무를 재판하자고 할 때에는 고발위원으로 선정되었다.
독립협회가 해산된 뒤 정부인사와 몰래 통하여 광무연간에 부사과·시독관·장례원상례(掌禮院相禮)를 지냈다. 1906년 보부상 단체인 공진회(共進會)의 평의원이 되어 회장 이준(李儁)과 함께 이유인(李裕寅)·구본순(具本淳)을 혹세무민하는 자라 하여 평리원(平理院)에 송치하였다가 체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