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철원 출신으로, 1883년 여름 김옥균이 파견한 일본유학생의 일원으로 도쿄[東京] 간다[神田]의 영화예비학교(英和豫備學敎)에서 공부하였다.
갑신정변의 실패 후 정부가 재일 유학생들에게 소환 명령을 내렸을 때 귀국할 의사를 표명하였으나 결국 이를 어기고 1885년 가을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계필은 미국인의 도움으로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의 한 대학교 입학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대학생이 되었다.
1888년 1월 워싱턴에 주미 공사관이 설치되자 이곳을 방문하여 친분을 쌓은 이계필은 박정양이 외교관의 면세권을 이용해 밀수한 여연송을 암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해 9월 초대 주미전권공사 박정양은 영어에 능통한 이계필에게 숙식과 학비를 제공하면서 워싱턴에 있는 대학교로 전학시킴과 아울러 공사관의 업무를 맡아보도록 주선하였다.
이계필은 컬럼비아대학교 혹은 링컨대학교을 다녔다고 하나 확실치 않으며, 1890년경에 대학을 졸업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때 박정양과 맺은 인연으로 이계필은 망명자의 처지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불안했던 미국 체류 생활을청산할 수 있었다. 이계필은 박정양의 도움과 천거를 받아 1891년 말경 귀국하여 내무부(內務府) 부주사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전운국 주사를 거쳐 1893년 외아문(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로 전임한 뒤 함경도에 파견되어 방곡령에 따른 일본인들의 피해사항을 조사 · 처리하였다.
1894년 내무부 주사로 복귀한 후 홍문관 부교리를 거쳐 운산군수로 임명되었다. 1895년 7월 운산금광채굴권을 부여받은 모스(Morse,J.R.)가 금광 실태를 조사할 목적으로 타운센드(Townsend,W.D.)를 파견하였을 때, 이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광산기계를 양도하는 업무를 수행하였다.
이계필은 의주 담당 세무시찰관을 거쳐 외부 주사로 근무하던 중 1896년 7월 독립협회 창립총회에서 간사원으로 선출되어 토론회 대표토론회원 · 제의 등으로 활동하면서 정부와 독립협회 간의 이견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다.
아울러 1896년 8월 한성부 소윤에 임명되어 당시 내무대신 박정양 · 한성판윤 이채연 · 내부 토목국장 남궁억 등과 함께 한성부의 도로 정비 및 신설, 준천 등 도시개조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 가장 청결한 도시로 탈바꿈’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후 밀양·양산·경산·언양·의령군수 등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