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일제강점기 때 미국에서 대한인동지회 총회장 ·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전주의 신흥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7년 미국으로 건너가 UCLA 등을 다녔다. 1921년에 설립된 이승만의 대한인동지회에 적극 참여하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집행부 위원으로 맹호군의 재정을 담당하는 등 독립운동을 펼쳤다. 광복 후에도 한인회관의 전신인 한인센터(Korea Community Center)와 무궁화한국학교를 설립하여 한인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건국에 이바지한 공로로 199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미국에서 대한인동지회 총회장 ·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위원 등을 역임한 교육자·사업가·독립운동가.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미국 도착 후 스탁톤의 농장에서 일하다가 1919년 소작농식으로 벼농사를 지어 성공했으나 그 다음 해 홍수로 손해보고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였다. 파사데나시의 폴리테크닉고등학교(Polytechnic High School)를 졸업한 뒤 가주대학교(UCLA)에서 전기과를 전공하고 남가주대학교(USC)와 유씨버클리(UC Berkeley)로 진학하였다. 아울러 김용중과 함께 김형제상회의 상품을 판매하다가 김송위탁판매소를 설립해 크게 성공하였다. 1921년에 설립된 이승만의 대한인동지회를 지원하였고, 1929년 로스앤젤레스에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가 결성되자 재무로 선출되어 줄곧 재정을 담당하였고, 뒤이어 총회장을 역임하는 등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 사이 1930년 일시 귀국했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1941년 4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를 통해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결성되고 로스앤젤레스에 집행부가 구성되자 집행부의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1942년 2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가 한인국방경위대로서 맹호군(猛虎軍)을 조직하였을 때, 참위(參尉) 계급으로 주계과(主計科)를 맡아 재정문제를 담당하였다. 1943년 4월에는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 회관을 마련하고 기관지인 속쇄판 『북미시보(北美時報)』를 발행하였다. 1944∼45년에는 3회에 걸쳐 독립금 3백 원을 출연하였으며, 1945년 7월에 열린 제1회 동지회 미국대표대회에 몬타나지방 대표로 참석하였다.
광복 후 이승만의 활동 경비를 조달하였으며, 1956년 5월 귀국해서 경무대로 이승만대통령을 방문하였다. 또한 대한인국민회를 대표하는 김호와 함께 현재 한인회관의 전신인 한인센터를 설립하였고, 1972년 무궁화한국학교를 설립하여 2세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데에도 힘썼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 『송철회고록』(이상수, 1985)
- 『50년사』(김원용, 1959)
- 『재미한인사략』(노재연, 1951)
- 「한인사회 선구자: 김호를 중심으로」(김지수, 한미동포재단, 『미주 한인이민 100년사』, 미주한인이민100주년기념사업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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