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5월 10일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설립하였다. 이후 오늘날까지 예배당으로서 기본적인 종교기능 이외에도 친교시설로 활용되면서 한인들의 정신적 안식처가 되었다. 또한 1910년 조직된 최대 규모의 미주한인독립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독립운동의 핵심적인 거점으로 역할을 다하였다. 현재 1938년에 건축된 건물이 남아 있으며, 1983년 구 교회 옆에 새로 교회 건물이 건축되었다.
1906년 5월 10일 한인들이 장로교를 선교할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 교회는 단순히 선교 활동을 펼치는 데 국한되지 않고, 하와이·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로스앤젤레스에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한 한인 동포들의 친교를 도모하고, 을사늑약 후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창립된 미주한인독립운동단체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려는 목적도 있었다.
1906년 평양신학교 교장 모펫(Samuel Moffet) 목사가 안식년 휴가차 로스앤젤레스에 왔다가 방화중 전도사를 만나 교회 설립을 의논하였다. 이를 위해 그들은 로스앤젤레스 장로교 노회선교부와 교섭하였고, 5월 10일 노회로부터 교회조직의 책임자로 파견된 프리차드(Augustus B. Prichard) 목사의 집례로 올리브 코트 2번지(2 Olive Court)의 건물에서 창립 예배를 드렸다. 이 예배에는 18명의 교인이 모여 방화중 전도사의 설교로 진행되었다. 1921일 4월 9일 이 예배당은 한인장로교회로 승격되었으나 1928년까지 노회에서 미국인 목사를 파송해서 관리했으며, 1929년 김중수 목사가 취임하면서부터 자치교회가 되었다.
설립 후 장로교를 선교하는 기본 기능 외에도 한인 동포들이 친교를 도모하는 장소가 되었다. 이 교회에서 활동한 교역자는 방화중·임준기·민찬호·이살음 전도사와 홍치범·김중수·김성락 목사 등이 있다. 그 외에도 1910년 미주 최대의 한인독립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가 조직되면서 총회관으로 사용되는 등 독립운동을 펼치고 후원하는 거점 역할을 하였다.
1906년 3차례 이전하였는데, 1938년 5월 1일 김성락 목사의 주도로 헌당식을 거행한 건물이 남아 있다. 지금의 교회는 1983년 구 교회 옆에 건축되었다. 이 교회는 대한인국민회 총회관을 관리하면서 독립운동유적지의 보전과 관리에 만전을 다하고 있다. 이를 효과적으로 보존·관리하기 위해 각계의 인사들로 구성된 보존위원회가 건물과 자료에 대한 보존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미주지역에서 한인들이 설립한 최초의 장로교회로서 종교적 기능뿐만 아니라 한인들의 친교 장소이자 대한인국민회를 총괄하는 총회관으로서 독립운동을 적극 펼치고 후원하는 거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