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순이 리들리에서 과수농장을 경영하다가 김호와 동업으로 김형제상회를 설립하여 신품종인 넥타린 개발하고 묘목을 재배하여 미국 전역에 판매해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이를 토대로 그들은 한인사회를 발전시키고 대한인국민회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다.
김호와 김형순은 리들리 한인사회뿐만 아니라 북미 대한인국민회의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러나 한인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한인사회를 규합하며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펼치는 데에는 무엇보다 재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그들은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김형제상회를 설립하였다.
김형순은 영어에 능통해서 1903년 최초의 미국 이민자가 하와이로 갔을 때 통역관 겸 인솔자가 되었다. 1906년 미국 본토로 이주하여 로스앤젤레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09년 귀국하였다가 1913년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1916년부터 리들리에 정착하면서 묘목회사를 설립하고 과수원도 경영하였다.
김호는 배재학당 등에서 교편을 잡다가 상하이를 거쳐 1914년 미국에 건너가 대한인국민회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3·1운동 당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특파위원으로서 독립의연금을 모금하는 과정에서 재정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1920년부터 리들리로 가서 김형순과 함께 농장을 경영하면서 1921년경 김형제상회를 설립하였다. 지분은 김형순 50%, 그의 부인 한덕세 25%, 김호 25%였다.
김형순은 미국인 원예전문가 앤더슨(Anderson)에게 의뢰하여 자두와 복숭아를 접목해서 털없는 복숭아인 넥타린(nectarine, 별명 Son of Peach)을 개발하였다. 김형제상회는 넥타린을 재배하여 르 그랜드(Le Grand)와 선 그랜드(Sun Grand) 상표로 미국 전역에 공급하였다. 또 넥타린 묘목을 독점으로 재배하고 수확한 과일을 포장해 전국 각지의 도매상에 공급하여 대성공을 거둠으로써 미주 한인 최초로 백만장자가 되었다.
김형제상회는 날로 번창해서 한인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었을 뿐 아니라 교회를 설립하거나 한인 공동묘지를 무료로 제공하는 등 지역사회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또한 김호와 김형순은 김형제상회에서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대한인국민회를 비롯한 독립운동단체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자금을 제공하였다.
김형순의 저택은 1950년대에 건축되었는데, 현재에도 리들리시에서 손꼽히는 저택으로 한인의 노력과 저력을 보여준다. 그곳에서 가까운 데 있는 김형제상회는 현재 마이클 견인사(Michael's Towing)가 들어서 있다.
김형순과 김호는 김형제상회를 성공적으로 운영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한 뒤, 한인사회의 발전과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그들은 안창호·이승만 같은 직업형 독립운동가들과 달리 독자적 경제기반을 갖는 일종의 부업형 독립운동가로서 조직을 중시하는 총무형 지도자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