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빙사절단은 미국의 공사파견에 대한 답례와 개화 · 자강정책 추진에 필요한 인적 · 물적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최초로 미국에 파견되었다. 그들은 1883년 9월부터 1개월 여 동안 미국에서 자주외교를 전개하고 개화정책에 필요한 미국인의 파견을 요청하였으며, 근대식 시설과 제도 · 문물을 살펴보았다. 그들 중 민영익 등은 유럽의 각국을 시찰하였다. 그들의 시찰은 조선이 호의적인 미국관을 형성하고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중국이 임오군란 후 조선의 내정에 직접 간섭하는 상황에서 1883년 5월 미국은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특명전권공사 푸트(Lucius H. Foote)를 파견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선은 독립을 보존하고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지원을 받기 위해 친미 정책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이에 1883년 7월 조선은 미국의 공사파견 조치에 감사를 표시한다는 명분으로 보빙사절단을 파견하였다.
보빙사절단에는 정사 민영익(閔泳翊), 부사 홍영식(洪英植), 종사관 서광범(徐光範), 그리고 수행원 유길준(兪吉濬)과 변수(邊燧), 고영철(高永喆), 무관 최경석(崔景錫) · 현흥택(玄興澤) 등이 임명되었다. 민씨 척족의 소장 영수를 비롯해 국제정세와 근대적 문물에 밝은 개화파인사들이 대거 발탁되었던 것이다.
1883년 7월 보빙사절단은 제물포를 출발하여 일본을 거쳐 9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하였다. 그들은 미국대통령 아더(Chester A. Arthur)에게 조선의 개국 연호가 적힌 국서를 봉정하고, 공식행사에 국기를 게양하는 등 자주외교를 펼쳤다. 또한 개화정책에 필요한 외교고문 · 군사교관 등의 파견을 요청하였으며, 근대식 시설과 문물을 시찰하였다. 10월 12일 보빙사절단은 유길준을 유학생으로 남겨둔 채 홍영식 등은 곧바로 귀국하였고, 민영익 등은 유럽을 거쳐 1884년 5월 31일 돌아왔다.
보빙사절단은 유럽 국가보다 미국이 경제적 · 군사적으로 우월하다고 판단하였다. 특히 홍영식 등 변법개화파는 우호적인 미국관을 갖고 근대적 개혁을 적극 추진하였으며, 중국과의 속방관계 청산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민영익은 귀국 후 서구식 정치제도의 도입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면서 개화파를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 이러한 견해차는 갑신정변을 일으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보빙사절단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미국과 유럽을 견문 · 시찰하였으며, 자주독립국임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자주외교를 펼쳤다. 또한 개화정책에 필요한 고문 등의 파견을 요청하고 각종 근대식 시설들을 살펴봄으로써 근대적 제도 · 문물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그들의 시찰과 보고서는 개화정책을 추진하고 호의적인 미국관을 형성하는 데 크게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