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고종 13) 잡과에 합격하였다. 아들은 화가 고희동(高羲東)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가 창간될 때에 편집 실무를 맡았던 사람이다. 1881년 군기(軍器) 제조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영선사(領選使) 김윤식(金允植)을 따라 청나라 톈진[天津]에 갔었다.
김윤식 일행이 중국에 간 것은 개항 이래 일본과 서양의 한반도 진출을 우려한 고종이 중국과 서양 각국의 문물과 제도를 배워오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 조선에서 간 학도는 모두 25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7명이 어학을 배우기 위해 수사국(水師局)에 있는 중서학당(中西學堂)의 입학시험을 치렀다.
고영철은 이들 응시자 가운데 합격한 3명의 하나였다. 시험과목은 양음(洋音)의 발음과 『좌전(左傳)』 읽는 법 등이었다. 그러나 합격자 가운데 두 사람은 곧 자퇴하였고, 고영철만 끝까지 남아서 주로 영어 공부에 주력하였으며 재능이 있는 것으로 평가받았다 한다.
『한성순보』는 1883년 10월 31일에 창간되었는데, 그때 『한성순보』를 발행하던 통리아문 박문국의 주사로 신문 편집에 참여하였다.
순보의 내용은 상해에서 발행된 중국 신문 『신보(申報)』와 『호보(滬報)』에서 전재한 것이 많았는데 고영철은 중국에서 영어를 배웠고, 한문과 중국어도 공부했을 것이므로 신문을 만드는 일에 적격이었을 것이다. 1883년에 보빙사(報聘使)의 일원으로 미국에도 다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