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고종 27) 수안군수·광무국감리(鑛務局監理)를 지냈고, 1894년 친군통위영우부령(親軍統衛營右副領), 1895년 내장원장원사장(內藏院莊園司長)·시위대부령(侍衛隊副領)을 역임하였다.
1895년 10월 12일에 왕실 근신인 이재순(李載純)·임최수(林㝡洙)·이도철(李都徹)·이민굉(李敏宏)·이충구(李忠求)·안경수(安駉壽)·김재풍(金在豊)·이세진(李世鎭) 등과 일부 양인(洋人)까지 포함하여 합작모의를 하였는데, 이들은 죽은 국모(國母)에 대한 복수와 김홍집내각(金弘集內閣)을 타도하고 정부를 개조하여 시국을 수습하자는 기도 아래 병력을 모아 궁궐을 공격한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이 있었을 때 호응 내지 배후조정자로 관련되었다.
그 뒤 1896년 7월 2일에 독립협회가 결성되어 독립문·독립관·독립공원의 건설을 추진할 때 발기인으로 위원이 되었고, 독립협회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1901년에는 상원군수, 1903년에 육군부령(陸軍副領)으로서 친위제1연대장, 1906년 육군정령(陸軍正領)을 역임하였으며, 1908년에는 태극장(太極章)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