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장 척화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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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 척화비
기장 척화비
근대사
유적
국가유산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에 있는 서양세력을 배척하기 위해 세운 척화비.
시도자연유산
지정 명칭
기장척화비(機張斥和碑)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지정기관
부산광역시
종목
부산광역시 시도기념물(1996년 05월 25일 지정)
소재지
부산 기장군 기장읍 대변리 608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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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에 있는 서양세력을 배척하기 위해 세운 척화비.
내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가 1995년 3월 1일 이 곳이 부산광역시로 편입되면서 1996년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크기는 가로 52.5cm, 세로 21cm, 높이 144cm. 화강석에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니 이를 자손만년에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지어 신미년에 세움”(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이라는 비문이 적혀 있다.

척화비의 설립배경은 외척의 세도정권을 약화시키고 새롭게 실권을 쥔 흥선대원군 정권의 대외정책 변화로 나타난 산물이다. 흥선대원군 정권은 국내적으로 국정쇄신을 통한 왕권강화정책에 초점이 맞추어졌고, 대외적으로 서구 자본주의의 제국에 대해 점차 쇄국정책으로 치달았다.

서구 제국의 천주교 승인과 통상 개방 압력은 흥선대원군 정권으로서 국내문제와 맞물려 복잡해진 난제를 해결해야만 하였다. 결국 대외문제는 병인, 신미양요라는 군사력 대결을 낳았으며, 나아가 쇄국정책으로 확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흥선대원군 정권은 자신들의 쇄국 의지를 모든 국민에게 알리고 경각심을 강화할 목적으로 전국의 중요 통로와 지점에 척화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이 척화비는 방형(方形)으로 당초에는 대변항 방파제 안쪽에 세워져 있었는데, 일제시대에 축항하면서 바다에 던져 버려졌던 것이다. 해방후 1947년경 부락 청년들이 인양하여 대변 수협지소 뒷편 송밑인 현 위치로 옮겨 놓았다.

참고문헌

『구기장군향토지』(재부구기장향인회,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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