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회설립운동은 1898년 독립협회가 민중과 제휴하여 추진한 의회설립을 위한 일련의 움직임이다. 서재필·윤치호 등 독립협회 지도자들이 독립협회 토론회에서 의회의 필요성을 공식 거론함으로써 표면화되었다. 독립협회는 궁극적으로 국민에게 참정권을 주어 전제군주정체를 입헌대의정체로 개편하고자 하였다. 정부에서는 중추원을 의회 형식으로 개편하고 독립협회와 황국협회의 회원을 중추원 의관에 임명하는 편법으로 의회설립운동을 저지하였다. 중추원개편안에 대한 논란 속에서 고종이 독립협회를 혁파시키면서 군주의 통치를 형식화하는 의회제적 군주제로 전환되지 못하였다.
1898년 3월 서재필(徐載弼) · 윤치호(尹致昊) 등 독립협회 지도자들간에 의회설립문제가 논의되고, 4월 3일 독립협회토론회에서 ‘의회원을 설립하는 것이 정치상에 제일 긴요함’이라는 주제로 의회의 필요성을 공식 거론함으로써 독립협회의 의회설립운동은 표면화되었다.
윤치호가 번역한 『의회통용규칙』이 4월 초순에 간행되어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배포되었고, 4월 중순부터는 『독립신문』에 광고를 내고 일반에 판매하여 의회설립에 대비한 예비지식을 보급하였다.
한편, 정부 일각에서도 3월 하순경에 정부의 자문기관으로 중추원 기능을 강화시켜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었다. 또한 4월 14일 정부고문인 르 장드르(Le Gendre, C. W., 李善得)가 윤치호를 방문하여, 전제정치와 대의정치는 모두 현실에 맞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정부대신의 견제기관으로 개화인사들로 구성되는 자문원(諮問院)의 설치를 제의하였다.
독립협회 고문 서재필은 4월 30일자 『독립신문』 논설을 통해, 세계 개화 각국의 선례에 따라 의회를 설립하면, 첫째 정책의 결정업무(의회)와 집행업무(내각)가 분업화되어 국정에 효율성을 기할 수 있게 되고, 둘째로 민의를 국정에 반영할 수 있어 국민과 국가가 일체감을 갖게 되며, 셋째로 관(官)과 민(民)이 협력하여 국가와 왕실의 기초를 공고히 할 수 있다는 취지하에 의회설립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주장하였다.
6월 하순 정부는 중추원에 30인의 의관을 두되, 10인은 하의원이 되어 의안을 상정하고, 20인은 상의원으로 이를 토의, 결정하여 정부에서 조처하도록 하는 의회형식을 가미한 중추원 개편을 구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외형적일 뿐, 기능이 정부자문기관의 범주를 넘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독립협회는 7월 3일과 12일에 거듭 상소를 올려 구주 각국의 상하의원의 설치는 만국통행의 규범이라 하고, 홍범의 준행과 인재의 등용 및 민의의 채용을 주장하면서 의회설립을 완곡하게 주장하였다.
7월 중순에 이르러 의회설립문제와 관련하여 조야(朝野)의 여론은 일단 중추원의 의회식 개편으로 기울어졌고, 7월 하순에는 중추원을 국가의 최고기관으로 개편한다는 설이 신문에 보도되었다.
그러나 중추원 개편에 대한 독립협회와 정부의 의도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독립협회 의도는 궁극적으로 국민에게 참정권을 주어 전제군주정체를 입헌대의정체로 개편하여 정부가 국민에게 책임지는 정치제도를 수립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당장 서구식 의회의 설립이 불가능하므로 일단 중추원을 상원형태의 과도기적 의회로 개편하되 실제적으로는 의회의 기능을 가지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한편, 정부는 외형적으로 의회적 색채가 가미된다 해도 본질적으로는 전제군주체제내에서 정부의 자문기관으로 중추원의 기능을 활성화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독립협회의 실제적인 의회설립운동을 무마, 저지시키려는 대응책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중추원 개편, 실시를 공언하고, 독립협회와 황국협회(皇國協會) 일부 회원을 중추원의관에 임명하였으며, 9월 하순에는 중추원을 개원하기도 하였으나, 독립협회는 정부자문기관인 중추원을 거부하고 실제적으로 의회기능을 가지는 중추원으로의 개편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독립협회의 의회설립운동은 독립협회와 민중이 수구파의 7대신을 탄핵하여 모두 퇴진시키고 내각교체를 단행시킴으로써 1898년 10월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렀다.
10월 12일 수구파내각이 물러가고 박정양(朴定陽)의 진보적 내각이 구성되자, 독립협회는 정부에 관민협상(官民協商)을 제의하고, 10월 15일 남궁억(南宮檍) · 홍정후(洪正厚) 등 독립협회 대표 5인과 박정양 · 민영환(閔泳煥) 등 정부대신들이 정부청사에 합석하여 의회설립과 내정개혁 문제를 정식으로 협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독립협회 대표들은 중추원장정을 외국의 의회법에 따라 제정할 것과 의관의 반수는 정부에서 선출하고 반수는 독립협회에서 선출하도록 할 것을 제의하여 정부측의 호의적인 반응을 얻게 되었다.
독립협회와 박정양내각이 의회설립을 순조롭게 추진하는 동안 수구세력이 크게 반발하고, 독립협회의 강력한 활동에 위협을 느낀 고종도 수구파를 다시 등용하는 한편, “국회도 할 수 없는 일을 민회가 남용한다” 하여 언론과 집회를 단속하는 조칙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독립협회와 민중은 “만국에 평행하는 것은 폐하의 권리이며, 탄핵하고 성토하는 것은 백성의 권리”라고 주장하면서, 시위와 농성을 통해 국왕의 언론통제조칙을 번복시켜 언론자유의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고종은 독립협회와 민중의 가두집회 등 강경한 활동을 억제하기 위해서도 중추원관제 개편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여, 10월 23일 박정양을 승진시켜 재등용하고 한규설(韓圭卨)과 윤치호를 각각 중추원의장과 부의장에 임명하여 중추원관제를 개정하도록 하였다.
중추원부의장 윤치호는 독립협회 대표를 겸하여 정부대신들과 합석하여 중추원 개편문제를 협의하였는데, 이때 정부에서는 정부자문기관으로서의 중추원관제개정안을 미리 만들어 독립협회의 동의를 얻고자 하였다.
10월 24일 독립협회는 정부의 개정안을 검토한 뒤, 이상재(李商在) · 이건호(李建鎬) · 정교(鄭喬) 등 3인의 위원이 작성한 독자적인 중추원관제개편안을 정부에 제출하였다.
주요 내용은 “중추원은 의정부의 자순(諮詢)에 응하며, 중추원 건의를 위해 법령칙령안, 의정부에서 의론을 거쳐 상주하는 일체사항, 중추원에서 임시 건의하는 사항, 인민헌의를 채용하는 사항 등을 심사, 의정하는 처소로 한다. 중추원은 의장 1인, 부의장 1인, 의관 50인, 의관 반수는 독립협회에서 회원으로 투표, 선거한다. 의장 · 부의장 및 의관의 임기는 12개월로 정한다.
의정부와 중추원에서 의견이 불합하는 때에는 부 · 원(府院)이 합석, 협의하여 타당하게 가결한 뒤 시행한다. 국무대신이 위원을 임명하여 주임하는 사항으로 의정부의 의원이라 하여 중추원에 나와 의안의 취지를 변명하게 한다. 국무대신과 각 부 협판은 중추원에 나와 의관이 되어 열석할 수 있다”는 등이었다.
정부대신들은 독립협회의 중추원관제개편안에 대체로 찬의를 표하였으나, 의관의 배정에 대해 황국협회도 같은 민회이므로 민선의관의 반수를 주어야 한다고 이의를 제기하였고, 고종도 민선의관 25석 중 17석만을 독립협회에 배정하도록 조칙을 내렸다.
그러나 독립협회는 중추원의관 50석 중 과반수의석을 확보하고자 하여, 10월 25일 민선의관 25석을 모두 독립협회에 배정하거나 아니면 황국협회에 배정하도록 정부에 요구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황국협회에 민선의관 전부를 담당할 수 있는가를 타진하였으나, 10월 27일 황국협회에서 불가능하다고 통보해옴으로써 독립협회가 의석의 과반수를 전담하게 되면서 의회식 중추원의 설립이 가능하게 되었다.
독립협회는 의회설립운동이 계획대로 진전되자 국정의 기본방향을 관민이 협의하기 위한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 개최를 정부에 제의하였다. 10월 29일 관민대공동회에서 6개조의 국정개혁강령(헌의6조)을 결의하고 정부대신을 통해 국왕의 재가를 얻었다.
11월 2일 헌의6조를 실시하기 위한 중추원신관제가 다음날 국왕의 재가를 거쳐 11월 4일에 공포되었다. 전문 17조로 된 중추원신관제는 10월 24일 독립협회가 제의한 중추원개편안을 거의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민선의관 25인 선출에 대해 독립협회의 중추원개편안에서는 독립협회 회원으로 고정되어 있었으나, 정부가 공포한 신관제에서는 ‘인민협회’에서 행하되 당분간은 독립협회에서 대행하도록 하여 차후 다른 사회단체에게도 참여의 길을 열어놓은 정도였다.
독립협회는 박정양내각의 통고에 의거, 민선의관 25인을 11월 5일 독립관에서 선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11월 4일 밤 조병식(趙秉式) · 이기동(李基東) 등 수구반동세력은, 독립협회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실시하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고종을 충동하여 박정양의 진보적 내각을 전복시키고 독립협회를 혁파시켰다. 이로써 눈앞에 둔 의회식 중추원의 실시도 좌절되고 말았다.
독립협회가 정부에 제안한 1898년 10월 24일 중추원관제개편안을 중심으로 하여 독립협회가 설립하고자 한 의회의 성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중추원의관의 반수는 관선으로 하고 반수는 독립협회에서 간접선거로 구성하도록 되어 있다.
지역적인 기초 위에서 전국민을 대표하는 의원으로 구성되는 의회가 대의제도의 기본요건임을 생각할 때, 독립협회가 구상한 중추원은 구성형식면에서는 국민대표성이 대단히 미흡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독립협회는 전국민을 대표하는 단체로 공인되었던 만큼 의식면에서는 중추원의 국민대표성을 긍정할 수 있으며, 독립협회의 중추원개편운동은 사실상 국민대표기관의 설립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둘째, 중추원의 의결사항으로 법률 · 칙령안, 의정부의 자문사항, 자체의 건의사항, 인민의 건의사항 등을 규정하여 불완전하나마 근대적인 입법기관 또는 민의반영기관의 기능을 부여하였다.
당시 독립협회는 “내치 · 외교 · 재정 · 군사 등 모든 정치를 중추원의 의결에 의해 행할 것”을 주장하였던 점에서 볼 때, 독립협회는 국정 전반에 걸쳐 정부통제의 기능을 가진 의회식 중추원, 곧 국정최고기관으로서의 의회를 구상하였다고 하겠다.
셋째, 국무대신과 각 부 협판은 중추원의관을 겸임할 수 있게 하였고, 국무대신은 위원을 구성하여 중추원에 출석, 의안을 설명하도록 하였다. 또한 중추원의 동의 없이는 의정부 단독으로 국무를 집행할 수 없도록 규정하였다.
즉, 정부는 국왕의 직접 결재가 아니고, 정부각료들이 의관을 겸임하도록 하여 일종의 의원내각 형식을 취하고, 집행사항은 모두 중추원의 결의에 구속되며, 국무대신은 주임사항에 대해 중추원에 책임을 지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내각이 의회에는 책임을 지지 않고 천황에게만 책임을 지는 메이지헌법(明治憲法)하의 일본의 제실내각제와는 성격을 달리하며, 내각이 의회에 책임을 지는 영국의 의원내각제적 발상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독립협회는 국민대표기관 · 입법기관으로서의 의회, 행정부를 강력히 통제하는 국정최고기관으로서의 의회, 그리고 정부가 의회에 책임을 지는 내각책임제적 의회주의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의회주의는 입법과 행정을 실질적으로 의회와 내각에 귀속시켜, 사실상 군주의 통치를 형식화하는 의회제적 군주제, 곧 입헌대의군주제의 실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의회설립운동은 중추원신관제의 반포로 일종의 의회법제정의 단계까지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의회설립이라는 궁극적 목표는 수구반동세력의 방해로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의의는 적지 않았다.
첫째, 의회설립운동의 결과로 정부가 의회식 중추원신관제를 반포한 사실은 전국민에게 선거 · 피선거권을 허락하지는 않았으나 ‘인민협회’, 곧 전국민을 대표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민간단체의 회원들에게 선거 · 피선거권을 부여함으로써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국민참정권을 공인하였다는데 가장 큰 의미가 있다.
둘째, 반포된 의회식 중추원관제는 당시 국민의 대표단체로 공인된 독립협회, 곧 민간단체의 초안을 정부에서 거의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이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의회법이 관민의 합의에 의하여 제정된 것을 의미하며, 관(官) 주도가 아닌 민간단체의 주도하에 성립되었다는 점에서 깊은 의미를 가진다.
셋째, 독립협회의 의회설립운동은 입법과 행정을 분리하여 궁극적으로 전제군주체제를 입헌대의군주체제로 전환시키려는 것으로, 갑오경장 당시 개혁파들이 정부와 왕실을 분리하여 전제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전환시키려 하였던 단계에 대의제를 추가하여, 우리나라 개화운동을 일보 전진시킨 것이며 개화기 개혁목표의 단계적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넷째, 의회설립운동이 수구반동세력의 방해로 끝내 좌절된 것은 당시 수구반동세력이 너무 완강하여 개화자강세력이 이를 극복할 수 없었다는 사실과, 이로 인해 개화기의 근대변혁운동이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며, 근대변혁운동의 실패로 개화기가 일제강점기로 이어지게 됨으로써 우리나라 근대사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