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월 12일 출생으로 본관은 우봉(牛峰), 호는 이당(二堂)이다. 후작 이완용의 차남인 남작 이항구(李恒九)의 장남으로, 이완용의 장남 이승구(李升九)가 사망하자 1914년 이승구의 사후 양자가 되었다.
1926년 2월 이완용 사망 후 후작 작위를 이어받았으며, 일본 도쿄[東京] 가쿠슈인[学習院]고등과를 졸업하고 1927년 2월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해 1931년 3월 졸업했다.
1931년과 1932년 조선총독부 학무국 편집 및 촉탁, 1934년 일본 궁내성 식부직 어용계(宮內省式部職御用係), 1937년 동요회(同耀會) 발기인 겸 이사장에 선출되었다.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39년 참사(參事)에 선임되었다. 같은해 배영동지회(排英同志會) 이사, 조선유도연합회(朝鮮儒道聯合會) 상임참사(常任參事)에 선임되었다.
1940년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와 동아합동목재(東亞合同木材) 주식회사 취체역에 취임했으며, 같은해부터 1942년까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개편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참사를 맡아 활동했다.
1941년 강원약업(江原藥業) 주식회사 취체역, 경성건물(京城建物) 주식회사의 대표취체역으로 취임해 1943년 12월까지 재직했으며,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사단법인 조선귀족회의 이사를 역임했다. 1941년 5월 정4위로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충추원의 칙임관 대우 참의에 임명되어 1945년 8월 해방 때까지 한 차례 연임했다.
1941년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의 상임위원, 임전대책협의회(臨戰對策協議會) 준비위원으로 각각 선임되어 같은해 9월 두 단체가 통합해 조직된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의 발기인 겸 이사에 선임되었다.
1943년부터 1944년까지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으로 활동했으며, 같은 해 북청철산(北靑鐵山) 주식회사와 강원생약(江原生藥) 주식회사, 강원임업(江原林業) 주식회사의 취체역을 지냈다. 1945년에는 조선생명징병보험(朝鮮生命徵兵保險) 주식회사 취체역으로 활동했다.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과 전라북도 익산 소재의 소유 임야 중 2분의 1 몰수형을 선고받았으며, 1950년 12월 28일 사망했다. 상훈으로는 1928년 11월 쇼와[昭和]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 1940년 기원 2600년 축전기념장 등이 있다.
이병길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제2조 제7·9·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2: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788~839)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