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영 ()

법제·행정
인물
대한제국기 외부대신, 법부대신, 중추원 고문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치행(致行), 금산(琹山)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58년(철종 9) 8월 10일
사망 연도
1929년 3월 1일
본관
경주(慶州)
정의
대한제국기 외부대신, 법부대신, 중추원 고문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자는 치행(致行)이고, 호는 금산(琹山).

생애 및 활동사항

1876년 부산 일본인 상점에서 소사로 일하면서 상술과 일본어를 익혔다. 1885년 제중원 서기, 1886년 외아문 주사로 임명되었다. 1887년 주차미국전권대신 일행이 미국으로 갈 때 전환국 위원에서 서기관으로 발령을 받고 동행하였다. 1888년 전권대신 박정양이 귀국하자 주차미국전권대신서리로 발령을 받았고, 1889년 귀국할 때 미국 정부로부터 철도 모형을 구해왔다.

1890년 기기국사사·웅천현감, 1892년 흥덕현감, 1894년 승정원우승선·외아문참의, 1895년 궁내부 회계원장, 1896년 한성부관찰사를 거쳐 주차일본국특명전권공사로 부임하였다. 1897년 주차일본국특명전권대사로 일본 황태후 장례식에 참석하였고,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1898년 중추원부의장·귀족원경을 거쳐 중추원의장에 임명되었고, 1899년 의정부찬정·주차일본국특명전권공사로 발령을 받았다.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1900년 4월 훈2등 태극장, 1901년 8월 대황제폐하성수오십년친경기념장, 1902년 10월 대황제폐하어극사십년친경기념장을 받았다.

1903년 전기철도사무사판위원장과 중앙은행 창설 사무위원을 맡았고, 궁내부 특진관 겸 임시서리 외무대신사무로 발령을 받았다. 1904년 의정부찬정·통신원총판·외부대신·관제이정소의정관으로 임명되었고, 일본 정부가 강요한 「한국 재정고문 및 외교고문 초빙에 관한 각서」에 조인함으로써 일제의 재정 및 외교권 침탈에 적극 협력하였다.

1905년 3월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훈1등 팔괘장을 받았다. 이 해 4월 「한·일통신기관 위탁에 관한 협정서」, 8월 「한국연해 및 내하천 항행에 관한 약정서」에 조인하였다. 또한 이 해에 법부대신이 되었다.

1906년 법부대신 겸 형법교정총재로 임명되었고, 홍주의병 김상덕(金商德)·이세영(李世永)·이사성(李思聖) 등에 대한 처결을 지휘하였다. 1907년 중추원고문이 되었고, 대한제국을 방문하는 일본 황태자를 환영하기 위하여 조직된 신사회 발기인·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해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1월 황태자전하가례식기념장, 8월 대황제폐하즉위예식기념장, 12월 훈1등 태극장을 받았다.

1908년 교남학회 회장, 대한여자흥학회 고문, 사립 소의학교 설립 발기인 및 교장, 대한산림협회 발기인·부총재 등을 맡았다. 1908년 이등공송덕비건의소 수금위원이 되어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송덕비 건립 등 추모운동에 가담하였다. 또한 대한상업주식회사 발기·창립에 참여하였다. 이 해 7월 일본 정부로부터 황태자도한기념장을 받았다.

1910년 대한작잠주식회사와 종묘주식회사에서 활동하였다. 국권 피탈 이후에는 1910년 10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어 사망할 때까지 역임하였다. 또한 1910년 10월 7일 일본 정부로부터 ‘한일합병’의 공로로 자작 작위를 받았다. 1911년 1월 13일 5만 원의 은사공채를 받았고, 1912년 8월 1일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5년 일제가 식민통치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개최한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 유공회원이 되었고, 일본 도쿄(東京)에서 개최된 일본왕즉위대례식에 귀족총대로 참가한 뒤 11월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6년 『조선반도사』 편찬사업 심사위원이 되어 일제의 한국사 왜곡 편찬사업에 협력하였다. 1917년 불교옹호회 평의원을 지냈고, 1919년 조선농사개량주식회사 발기인 총대를 맡아 이토히로부미 10주년 추모제에 참석하였다.

1920년 삼성무극교 발기에 참여해 삼성무극교도화원총본부를 설립하였다. 1922년 대륙고무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사장이 되었다. 1924년 조선구제원 고문, 1925년 재단법인 조선불교단 고문과 조선귀족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순종 국장 장의위원과 교육협성회 고문을 맡았고, 동민회 고문으로 선임되었다.

1927년 귀족을 중심으로 구성된 조선토지흥업주식회사 창립위원장을 맡았다. 1928년 일본에서 열린 일본왕즉위대례식에 참가한 뒤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9년 3월 1일 사망 직후 욱일동화대수장이 추서되었고, 6월에 아들 이규원(李圭元)이 작위를 이어받았다.

참고문헌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2009)
『친일재산 국가귀속 결정문』 2: 친일재산조사위원회 백서 3(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서광인쇄공사, 2010)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4(친일반민족행위자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www.koreanhistory.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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