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유(聖惟). 조형관(趙亨觀)의 아들로 조형만(趙亨晩)에게 입양되었다.
1859년(철종 10) 증광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1866년(고종 3) 성균관대사성·이조참의 등을 역임하였고, 이듬해 동지부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70년 예문관제학·홍문관제학·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이듬해 예조판서에 올랐다. 이 해 동지사의 정사로 재차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의정부좌참찬·대제학을 지내고 1873년 다시 예조판서로 임명되었다.
이때 경무대(景武臺)에서 실시된 정시문과의 독권관(讀券官)이 되어 고종에게서 시관으로 공평무사하라는 명을 받들었다. 또한 예조판서 재직 중 최익현(崔益鉉)의 대원군 탄핵상소가 있자, 호조판서 김세균(金世均) 등과 연명상소하였다.
최익현의 상소 중 국왕에게 개혁을 건의하는 논의가 없다고 한 것은 자신들의 죄였으므로, 처벌을 바란다고 하여 월봉3등지전(越俸三等之典)에 처하여졌다. 이듬해 전라도관찰사로 임명되어 당시 극심한 수재로 전주 등 각읍의 민호(民戶)가 피해가 많으므로, 각종 세납물의 상납 기일을 늦추어달라는 장계를 올렸다.
또 전라도에 면포가 부족하므로 병조의 각 군문(軍門)과 각 아문의 번포(番布)를 돈으로 대납할 수 있도록 하여달라는 장계를 올리는 등 선정을 위하여 힘썼다. 1876년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