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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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구조
개념
사람이 개인 또는 나라의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누리고 행사하는 기본적인 자유와 권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사람이 개인 또는 나라의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누리고 행사하는 기본적인 자유와 권리.
내용

인권에 관한 관념과 제도는 근대시민혁명을 계기로 하여 정립되었다. 인간과 시민을 권리의 주체인 인격으로 인정하여 모든 인간의 이름으로 인권을 선언, 제도화한 것은 근대시민사회에서 이룩된 위대한 진보이다.

여기에서 인권을 주장하여 제도화시킨 정치적 주도세력은 누구이고 그 제도화에 있어서 이론적 근거로 내세운 사상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살펴본다.

근대 이전의 봉건적 구체제 안에서는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구지배계급에 대립하는 시민계급이 대두하였다. 이 시민계급 중 상층시민은 일찍이 어용상인·특허상인으로서 전제군주와 야합하여 봉건세력인 귀족을 견제하면서 사회적·경제적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 뒤에 산업의 발전으로 시민계급은 독자적인 정치적 발언권과 경제적 권익의 보장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구체제가 사회발전의 질곡(桎梏: 몹시 자유롭지 못함.)으로 화하여 위기증상을 띠게 됨에 따라 시민계급이 농노와 도시하층계급과 연대하여 구체제에 도전,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기에 이른 것이 시민혁명이다.

그 전형적인 사건이 1789년의 프랑스혁명이며, 이 혁명의 이념과 목표를 천명한 것이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다. 이 시민혁명의 사상은 한마디로 근세 자연법사상이다.

자연법이라고 하면 실정법(實定法)이 있기 이전에, 그리고 실정법의 존재와 관계 없이 존재하는 바른 질서의 법이라는 관념인데, 중세의 봉건적 자연법사상은 신의 이름으로 봉건적 신분질서를 정당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민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자연법은 이성(理性)의 이름으로 바른 질서를 제시하였다.

그 대표적인 자연법론이 영국의 명예혁명(1688)을 옹호한 로크(Locke, J.)의 사상이다. 로크는 실정법이 제정되기 이전 상태, 다시 말해서 국가(정부)가 있기 이전의 자연상태에서도 자연법이 있었으며, 그 자연법에 근거한 자연권의 내용은 생명·자유 및 재산의 권리라고 하였다.

그러한 천부인권(天賦人權)을 보다 잘 보장하기 위하여 인민 사이에 동의를 얻어 정부를 세운다. 따라서 정부가 그러한 설립취지에 따른 구실을 못하면 정부를 폐지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울 수 있다고 저항권(抵抗權)의 사상을 분명히 하였다. 1776년의 미국의 독립선언이나 1789년의 프랑스인권선언 제2조가 바로 그러한 내용을 명시하였다.

근대시민헌법은 미국이나 프랑스시민혁명의 자연법사상의 성문화라고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시민혁명이 철저하게 수행되지 못한 나라의 헌법체제를 외견적 입헌주의(立憲主義)라고 하는데, 이러한 헌법체제하에서는 자연법사상이 부정되고 실정법 위주의 법사상, 법실증주의(法實證主義)로 대체된다. 여기에서는 천부인권과 저항권은 부정된다.

자연법사상을 계승한 체제에서의 인권의 성질은 다음과 같다. ① 인권은 모든 사람이 누려야 하는 권리라는 점에서 보편성을 지니고 있고, ② 인권은 사람으로서 태어난 사람은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권리라고 하는 점에서 고유성을 지니고 있으며, ③ 인권은 사람이 일시적으로 누리는 권리가 아니라 항구적으로 누리는 권리라는 점에서 항구성이 있으며, ④ 인권은 정부권력 등 외부의 침해를 당하지 아니한다는 뜻에서 불가침성이 있다.

그런데 인권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 사람으로서나 나라의 구성원으로서나 누리고 행사해야 할 자유와 권리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대와 사회가 변동하여 새로운 문제가 제기될 때에 그 내용이 추가되고 변하기도 한다.

근대시민국가의 기본과제는 정치권력의 자의적 침해로부터의 자유에 있다. 그런데 현대자본주의사회에 이르면서는 정치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이외에 사회 계급·세력간의 갈등과 거기서 일어나는 인권침해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제기된다.

이에 대하여 수정자본주의 나라의 헌법은 사회권을 추가하고 있다. 제1차세계대전 후의 「바이마르헌법」이 그 예이다. 제2차세계대전 후에는 이를 보다 강화한다. 특히,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자본주의 나라의 헌법에서는 정보화·산업화에 따른 문제에 대응하여 프라이버시의 권리, 정보공개청구권(알 권리) 및 환경권 등이 추가된다.

한편 제2차세계대전 이후의 인권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와 체제를 달리하는 공산주의·사회주의 나라와 제3세계에서 각기 다른 모습을 띠고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체제 사이의 인권문제가 각기 제기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권의 국제적 보장이 모색되어, 「국제인권규약」으로 제도화되고 있다.

인권은 사람을 존중하는 정신을 바탕으로 개개인의 주체적 권리를 제도화한 것이다. 사람을 존중하는 사상은 비단 근세에 있는 것만은 아니지만, 권력에 대한 관계를 상호적 거래관계인 계약이라고 하는 대결관계로까지 제도화시킨 것은 근대적 인권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각 개인이 자유의지의 행사자로서 신분적 제약을 인정하지 않는 자연상태를 가정함으로써 가능한 권리를 말한다. 조선왕조의 통치이데올로기인 유교의 통치사상에도 통치의 객체인 피치자(被治者)에 대한 아낌의 생각이 있다.

그런데 유교의 ‘민본주의(民本主義)’는 백성(民)이 주체가 되는 대등한 인격을 인정하지 않고 아껴주어야 할 객체로서 대하는 사람아낌이었다. 이이(李珥)가 『성학집요(聖學輯要)』에서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라고 하였을 때 백성은 어디까지나 통치의 객체이지 주체는 아니었다.

조선시대 말에 이르면서 한국판 근세계몽사상인 실학(實學)에서 우리는 근대적 사회계약설과 백성이 주인이라는 사상(주권재민적 사상) 및 폭군방벌론(暴君放伐論)의 사상에 접하게 된다. 정약용(丁若鏞)의 『원목(原牧)』과 『탕론(湯論)』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실로 당시의 상황으로는 혁명적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왕조 지배체제의 제반모순을 개혁하고자 제기된 이론과 대책에서, 정약용은 백성 개개인의 주체적 권리의 천부인권성을 이론화시켜 실천으로 향하는 문제제기를 뚜렷이 하지는 못하였어도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고 백성을 위해서 임금을 가려 뽑아 세웠으며, 그 백성이 잘 살게 되는 것이 치자(治者)의 천직이고 이를 다하지 못할 때에는 백성이 이를 갈 수 있다는 생각을 대담하게 제시했다.

그래서 그는 임금(권력자)은 인민이 가려 뽑은 자이고 그에 따라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하면 바꿀 수도 있는데, 오히려 후세에 와서 권력자가 인민을 억압하고 학대하며 순종하지 않는다하여 반역으로 몰아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백성이 주인인 나라와 백성의 권리의 천부인권성이 마무리된다.

정약용 등 실학파의 사상은 그 뒤에 개화파·독립협회파운동 등을 거쳐 인권사상으로 정리되면서 한국판 시민(부르주아) 정치사상으로 성숙된다. 그러한 사상운동과 관련된 사건으로 갑신정변(1884)·갑오농민전쟁과 갑오개혁(1894)을 들 수 있다.

갑신개혁 운동은 실학전개의 일환으로도 볼 수 있으나 위로부터의 일부지배층 선각자들에 의한 급진개혁의 시도로서 자체 역량의 미숙과 외세에 의존한 전술적 과오로 실패한다.

근대개화파 개혁론의 일환으로서 인권론은 유길준(兪吉濬)의 『서유견문(西遊見聞)』에서 잘 나타난다. 유길준은 당시의 개화파 중에서 온건노선에 선 입헌군주제론자(立憲君主制論者)이며, 서방법제에 가장 다양하게 접하여 영향을 받은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는 말하기를 “사람이 세상에 난 뒤에 점유한 지위는 사람이 만든 구별이요, 향유한 권리는 하늘에서 받은 공도(公道: 공평하고 바른 도리)이니, 사람이 사람되는 이치는 천자로부터 필부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차이가 없으므로……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으니…….”(서유견문, 제4편)라고 하였다.

이는 그가 개화파로서 실학의 유산을 이어받은 바탕 위에서 서방의 법제도에 접하면서 이를 받아들인 것을 엿볼 수 있다. 당시 그의 처지로 보면, 일본의 문물이나 학자와의 내왕이 빈번하였고, 거기서 영향을 받고 있다.

그가 교유한, 일본의 근대화에 기여한 선각자인 후쿠자와(福澤諭吉)는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아래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갑오개혁은 우리 나라에서 근대인권을 제도화 시키려는 시도로서 높이 평가될 수 있으나, 그것이 일본제국주의의 후견과 압력하에서 이루어진 데 문제가 있다.

이 갑오개혁에서 인권에 대한 항목을 보면 ① 만민평등의 선언과 문벌귀천을 초월한 인재등용, ② 문무 사이의 차별타파, ③ 노비제도의 폐지와 인신매매의 금지, ④ 조혼금지, ⑤ 연좌제도의 폐지, ⑥ 과부혼인의 자유공인, ⑦ 인신구속절차의 신중조처와 관리의 횡포제한 및 사인(私人)에 의한 인신구속의 금지, ⑧ 형벌제도의 개혁과 고문 등의 폐지, ⑨ 정치적 의사표명의 자유 등이다.

물론 이것이 실제로 어느 정도 시행되었는가 하는 것은 전과 다름없이 숙제가 된다. 한편 위로부터의 개혁과 차원을 달리하는 ‘밑으로부터’의 개혁과 인권문제는 갑오농민전쟁에서 농민군측이 제시한 개혁요구안을 들 수 있다.

갑오농민전쟁에서 농민은 동학의 ‘인내천사상(人乃天思想)’이라는 사람존중의 정신을 바탕에 깔고 있고, 동학이라는 종교적 외피를 쓰고 조직화되어 밑으로부터의 자생적 변혁을 주장, 제시하였다.

갑오농민전쟁에서 농민군측의 개혁주장은 폐정개혁안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정면에서 군주제도의 개폐문제를 들고 나오지는 않았으나, 반봉건(反封建)·반제(反帝)의 기치를 선명히 하여 농민을 비롯한 이름없는 백성의 권리를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왕조의 양반지배층은 자기의 지위를 보존하기 위하여 외세침략자와 타협하고 투항하여 백성을 배신하고 나라를 팔아먹었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조선강점이 한일합병이라는 이름으로 1910년에 공식조약으로 마무리지어졌다. 물론 그 이전에 이미 조선왕조는 문호개방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한 이래 제국주의열강의 반식민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근대법제는 합병 이후에는 보다 본격적으로 가속화되어 일제의 식민지체제의 일환으로 이식되었다. 당시 후진자본주의 나라로서 선진국인 영국·미국·프랑스·독일 등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대오에 끼려는 일본제국주의는 식민지 조선을 발판으로 하여 진출을 시도하였다.

후진자본주의 나라로서 일본은 이미 ‘소셜 덤핑’을 통하여 해외시장의 개척을 모색해왔으므로 자국내에서 민권운동을 탄압하고, 유교적 충효이념과 신권적 천황제(神權的天皇制)를 통치이데올로기로 하여 강권통치에 임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법사상에서 나오는 천부인권론과 저항권론은 애당초 용납할 수 없는 불온한 사상이었다.

따라서 일본의 식민지였던 실정은 가히 짐작할만하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외견적 입헌주의헌법인 「대일본제국헌법」(1889)조차 시행되지 못하였다. 일본은 식민지 조선의 반제운동을 압살하기 위해 치안유지법으로 통치를 했기 때문에 인권이라는 것은 입에조차도 올릴 수 없는, 인연이 먼 것이었다.

1945년 일본제국주의가 패망한 뒤 우리 나라에는 미국·소련 양군이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각기 진주하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남북의 항구적 분단으로 이어진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군정을 선포하면서 일제의 식민지법령을 전면적으로 폐지하지 않고 정치적 악법 일부만을 폐지한 채 효력을 지속시켰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에도 구법령이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 한 효력을 지속시켰다.

물론 헌법제정은 우리 역사상 인권에 관한 획기적 전기를 맞이하는 의의가 있었다. 미군정 당시에 영미법(英美法)의 적부심사제도를 도입하고 경찰관에 대한 고문금지를 조처하는 등 인권상황의 개선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나, 권리장전(인권선언)이 체계적으로 정비되는 것은 헌법제정을 계기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권이 헌법에 성문화되었다고 인권보장이 충족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인권보장의 법률적 조건이 마련되었다는 것이고, 인권이 실제로 보장되려면 통치과정에서 법집행을 통해서 이뤄져야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국민의 인권의식과 이를 실현하려는 의지와 여러 가지 정치적·경제적 조건도 갖추어져야 한다. 건국 초에 우리의 사정은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1950년 6·25전쟁으로 말미암은 전시하의 계엄통치는 법치주의의 정착에 많은 차질을 빚게 하였다.

제헌(1948) 이후 지금까지 9차에 이르는 개헌이 주로 권력구조의 문제를 둘러싼 정치변동이었기 때문에 인권상황의 획기적 개선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현행헌법의 인권규정을 보면 ① 행복추구권, ② 평등권, ③ 자유권, ④ 사회권, ⑤ 청구권, ⑥ 참정권 등이 있다.

먼저 행복추구권·평등권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존중, 그리고 행복을 추구하는 권리로 총칙적 규정으로 밝혀져 있다.

다음으로 자유권을 내용별로 보면 ① 신체의 자유로 적법절차의 보장, 영장제도의 보장,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 구속적부심청구권·자백강요금지 등의 규정과 소급처벌금지와 일사부재리의 원칙 등이 있고, ② 정신의 자유로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학문과 예술의 자유가 있으며, ③ 사회·경제적 자유로 거주 이전의 자유, 직업선택의 자유, 주거의 불가침보장,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재산권의 보장 등이 있다.

사회권(생활권)으로서는 교육을 받을 권리, 근로의 권리와 근로기준의 법정, 노동삼권,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 환경권, 혼인과 가족 및 모성 등의 보호를 받을 권리 등이 있다.

청구권적 기본권으로서는 청원권, 재판을 받을 권리, 형사보상청구권, 국가배상청구권, 범죄피해자급부청구권 등이 있다. 참정권(정치권)으로서는 선거권과 공무담임권이 있다. 끝으로, 이러한 권리에 대응한 의무로서는 납세·국방·교육 및 근로의 의무가 부과된다.

헌법의 인권규정의 자구(字句)만을 볼 때 손색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문제는 인권이 실제로 얼마나 제대로 보장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헌법과 법률에 정한 인권규정은 인권보장의 가능조건이지 그 자체가 인권보장의 조건충족은 아니다.

우리의 인권상황에서는 고전적·부르주아적 인권보장이 가장 시급한 문제이다. 그렇다고 현대사회의 산업화에 따른 모순에서 문제되는 사회권이 도외시될 수도 없다. 거기에다가 분단상황은 인권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남과 북 양쪽의 권위주의체제의 억압성은 상호 영향을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현대의 인권문제는 국내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제문제이다. 이에 따라 인권의 국제적 보장문제가 제기된다. 우리는 국제인권규약에 가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가입에 대응한 제반 인권상황을 정비하는 것이 시급하다.

한국 헌법은 인권이 최고의 법이념이라고 하는 현대헌법의 계보를 따라 제정되었다. 그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으나, 실제로 정부마다 인권 보장의 문제는 그 당시의 정책에 따라 변하고 그에 따라 문제가 있어 왔다.

특히 건국 초 출범한 이승만 정부(1948∼1960년)는 당시 좌우갈등의 혼란과 전쟁으로 관료주도의 질서유지와 그에 편승한 정적을 제압하기 위한 집권세력의 친일분자의 정권 유지용 반공주의(反共主義)가 인권에 대한 불법 부당한 탄압으로 나타났다.

일제 관료출신의 경찰관리가 주도한 탄압과 이승만의 집권연장을 위한 탄압이 건국초기의 법치주의 확립에 지장을 주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집권한 장면 정부의 자유주의적 인권보장 정책은 오히려 질서문란으로 기득권층이 간주하여 5·16군사정변(1961년)의 구실이 되어 일 년 못되는 자유시대에 종말을 고했다.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1979년 박정희 사망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노태우 정부를 통해 유지되었고 1993년 김영삼정부도 ‘문민정부’를 자처했으나, 군정의 변형적 연장에 불과했다.

이 군정은 ‘개발독재’라고 호칭되듯이 국민들에게 경제개발을 지상과제로 내세워 독재를 정당화했다. 따라서 인권과 민주주의의 보장이란 개발이후의 문제라고 보는 정책을 선명히 했다. 그런데 이 군정 30여 년 동안 인권정책의 문제를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① 법치주의와 인권이 개발과 능률의 극대화란 요구에 밀려 뒷전으로 물러나는 결과가 되어 관료주의가 더욱 극성을 떨게 되었다.

② 군정이 계엄과 정보공작에 의한 나라의 병영화를 초래한 국가관리여서, 국민의 인권이 권력자에 의해 무시되는 일이 경제개발과 국가안보를 이유로 빈번하게 일어났다.

③ 특히 국가안보란 이념과 이유는 1972년 유신 쿠데타 이래 더욱 정권연장에 악용되어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을 훼손시켰다.

④ 일제 때 치안유지법에 명시된 전향제도나 예방구금제도가 사회안전법, 보안관찰법 및 법무부령으로 이어지면서 시민적 자유의 기본인 양심·사상의 자유조차 존립이 위태로운 실정이었다. 김영삼 정부출범 이래 악법개폐의 문제가 개혁의 이름으로 제기되어 약간의 수정 개량의 기미가 보였으나, 기본이 변경되진 못했다.

1998년 김대중정부의 출범은 50년만의 수평적 정권교체로 평가되어 인권정책에서도 새로운 변화가 보이고 있다. 아직은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그 현황과 문제를 전망해 본다.

① 국가안보를 정권연장에 이용해서 탄압하는 사례의 시정이 이뤄져야 한다. 여기서 유엔인권위원회, 국제사면위원회 및 미국국무부까지도 지적·비판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의 악용문제가 있다. 이적표현이나 통신 잠입, 이적단체구성 등 악용·남용되어 온 조항을 개폐해야 할 것이 과제로 남아있다.

② 김대중 정부는 50년만에 사상전향제도를 폐지했으나 그 변조판인 ‘준법서약제’를 신설 운영하고 있다.

③ 인신구속에서 영장실질심사제 등 개선을 한 것은 평가될 수 있으나, 고문·가혹행위 등 악습의 제거가 보다 지속적으로 이행되어야 한다.

④ 행정공개와 정보접근에서 보다 열린 정부가 되도록 관료주의적 밀실행정의 관행과 관료특권적 폐습이 청산되어야 한다.

⑤ 국가인권위원회와 같은 기구설정의 구체화는 평가할 만하다. 다만 이 기구의 위상과 권한의 실제적 효과성이 계속 문제가 되고 있다.

⑥ 인권교육과 계몽과 나아가서 생활화가 보다 활성화되어서 격변하는 시대의 문제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현대 기술문명과 정보화 및 지구적 시장화의 추세하에서 인권문제는 개인의 사생활과 자기결정권의 문제, 정보접근권, 노동자의 기본적 생존권과 노동3권과 기업에 대한 관계에서 공정한 처우를 확보할 문제 특히 노사갈등의 실업문제를 노동권 차원에서 조정 해결할 필요성의 승인, 외국인 노동자의 입국과 그들의 인권문제, 아동의 인권과 청소년의 정상적 교육·학습의 권리보장, 고령화와 노인의 인권문제, 생명권과 장기이식 문제 등- 새로운 인권문제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원래 인권문제란 특정한 시대와 사회적 조건에서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 자유와 권리의 문제이기 때문에 사회가 변천함에 따라 새로운 과제가 제기된다. 21세기를 맞은 현재 환경, 인구, 전쟁과 분쟁 등 문제는 더욱 어렵게 되고 있다. 그 중에도 제3세계와 선진국간의 정치 경제 문화상의 격차는 오히려 심화되어 가고 있다.

제3세계의 가난한 민중의 인권문제가 더욱더 악화되는 면도 주목된다. 여기서 현대의 인권 문제는 국내문제가 아니라 세계적인 국제문제로서 우리 앞에 닥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참고문헌

『현대인권론』(한상범, 동국대학교 출판부, 1988)
『한국철학사』(한국철학회 편, 동명사, 1987)
『기본적 인권』(한상범, 정음사, 1985)
『한국의 개화사상』(강재언, 정창렬 역, 비봉출판사, 1981)
『한국근대법사상사』(최종고, 박영사,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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