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에 대한 성별 고정 관념과 성차별에 반대하며 여성의 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한국의 여성 운동(女性運動)은 19세기 후반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를 가진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의 여성 운동은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라는 좌우 양 진영 모두에서 활성화되었다. 좌우 합작의 전통도 존재하는데 1927년 결성되었던 근우회, 1945년 해방 직후 결성되었던 건국부녀동맹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미군정기와 한국전쟁을 지나며 좌파 여성 운동은 사실상 유명무실화되었고, 우파 여성 운동만이 미군정 및 이승만 정권과의 협조 속에 살아남았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1970년대 중반부터 다시 시작된 좌파-진보적 여성 운동의 계보를 잇는 핵심 단체이다.
1970년대 종교계, 여대생, 여성 지식인, 민주노조 등 다양한 영역에서 싹트기 시작한 진보적 여성 운동은 1980년대 들어서면서 조직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80년 여신학자협의회, 1983년 여성평우회, 여성의전화, 또 하나의문화, 1986년 기독여민회 등이 그것이다. 당시 여성 운동 단체들은 1984년 경찰의 여대생 성추행 사건을 시작으로, 1985년 25세 여성 조기 정년제 철폐 운동, 톰보이 불매 운동 등을 공동으로 전개해 나갔다.
또한 사안별로 1985년 여성노동자생존권대책위원회, 1986년 KBS-TV시청료폐지운동여성단체연합, 여성단체연합성고문대책위원회 등을 결성하여 공동으로 대처해 나갔으나 상설 공동 투쟁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때 기존의 보수적 여성 운동에 비판적 입장을 공유하면서 그와 구별되는 진보적 여성 운동 단체의 연합체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데 의견을 일치시키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은 1987년 2월 18일 오전 11시, 개편 총회를 열고 21개 회원 단체가 모인 가운데 결성되었다. 총회의 명칭이 개편 총회인 이유는 이전의 사안별로 결성되었던 연대체를 상설의 연대체로 개편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회장으로는 이우정 선생을 만장일치로 선출하였고, 부회장은 각 부문을 대표하여 박영숙, 김희선, 이미경, 엄영애, 이영순 등을 선출하였다.
창립 당시만 하더라도 창립 선언문도 없었고 조직적 기반이 탄탄한 것도 아니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의 공간 속에서 서울과 지방에 여성 운동 단체들이 앞다투어 창립되었고, 여성의전화, 여성민우회 등의 전국화가 이루어지면서 여연 역시 전국 조직으로 발돋음하게 된다. 2022년 7월 현재에는 전국 7개 지부, 28개 회원단체를 거느린 진보적 여성 운동을 대표하는 단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창립 당시 한국여성단체연합의 목표는 성별 고정 관념에 도전하고, 성차별 반대를 통한 여성 해방의 쟁취와 함께 한국 사회의 민주화 및 자주화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여연은 본업인 여성 운동에서 성당한 성과를 거뒀다. 사실상 민주화 이후 여성 관련 법제화에서 여연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1988년 「남녀고용평등법」 개정, 1989년 「가족법」 개정, 1991년 「영유아보육법」 제정, 1993년 「성폭력특별법」 제정 운동, 또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운동, 여성부 발족, 여성 할당제 실현, 「가정폭력방지법」, 「성매매방지법」 제정, 그리고 호주제 폐지 등을 들 수 있다. 다만, 여성 의제가 정책화 · 제도화되고 여연 인사들도 정부로 진입하게 되면서 여성 운동의 제도화, 국가 페미니즘의 한계 등이 제기되기도 했다.
여연은 1990년대 들어서면서 보수 진영 여성 단체들과도 협력해 나갔는데, 1994년 지방자치 선거를 앞두고 보수 진영의 여성 단체들과 함께 ‘할당제를 위한 여성연대’를 결성하였고, 2000년에는 진보 · 보수 여성 단체뿐만 아니라 범시민 단체들과 함께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 연대를 결성, 2005년 호주제 폐지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1985년부터 매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한국여성대회를 주관하고 있으며 성평등 의제와 성평등 문화 확산을 위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나아가 여연은 사회 전반의 민주화 운동 및 민주주의 확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87년 4·13 호헌 조치가 선포되었을 때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고 농성에 돌입했으며, 6월 항쟁 기간 동안에는 국본에 참여하였고 6·18 최루탄 추방의 날을 주최하였다. 민주화 운동 단체들의 연대체인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에 가입하여 평화 통일 운동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연 회원단체들이 점차 시민 운동 지향성을 강화해 감에 따라 1992년에는 전민련의 후신인 전국연합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1990년대 이후 여연은 온건한 시민 운동 형태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활동들, 세월호 참사에 대한 대응 활동 등 한국 사회의 다양한 민주주의 문제들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공동 행동을 해 나가고 있다.
여연은 한국전쟁 이후 명맥이 끊겼다가 1970~80년대 부활한 진보적 여성 운동을 대표하는 단체로서 오늘날까지도 그에 걸맞는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민주 정부의 출범 이후 다양한 여성 관련 법제화가 이루어지고, 정부 내 여성부가 만들어지면서 여연을 비롯한 진보적 여성 운동 단체 출신 인사들이 정부 각 부처에 진출했다. 여성 관련 법제화와 정책 마련을 목표로 활동해 온 여연으로서는 반길만한 일이었지만 이후 여성 운동의 제도화, ‘주류’ 여성 운동의 위기 논쟁이 유발되었다. 또한 1990년대 영 페미니스트, 21세기 영영 페미니스트 등 새로운 여성 세대가 출현하면서 여연으로 대표되는 올드 페미니스트와의 차이, 갈등, 간극 등이 드러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