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YWCA 대학생부 간사로 활동하였으며, 1971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사무처장직을 제안받고 여성운동을 시작하였다. 1973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를 비롯한 61개의 여성단체가 참여하는 범여성가족법개정촉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1974년에는 기독교장로회여신도회 부회장직을 역임하며 ‘생명문화창조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1980년대 후반 ‘생활협동조합운동’으로 발전하였다.
1970년대, 1980년대 박영숙은 소비자운동, 환경운동, 여성운동, 노동운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활동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19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으로 박영숙은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활동하며 정치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1987년 11월 평화민주당(평민당)의 부총재로 입당하였다. 그리고 6월항쟁(六月抗爭)을 이끈 민주쟁취국민운동지부에서 활약하였다.
1988년 3월 야권 통합 문제로 김대중(金大中)이 총재직을 사퇴한 후 4월에 박영숙은 총재 권한 대행으로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88년 4월 26일에 진행된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평화민주당 전국구 1번으로 국회의원이 되었다.
국회의원 임기 동안 통일문제대책특별소위 위원장, 80년언론탄압진상조사 및 대책위 위원장, 노사문제대책위원회 위원장, 조선일보허위왜곡보도대책위원회 위원장, 맑은물대책특위 위원장, 서울시정수장 수질조사단 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91년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도전하지 않고 국회의원직을 마쳤다.
1993년 민주당 최고위원으로 정당을 이끌었다. 1998년부터 8년간 대통령자문통일고문회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1999년 한국여성재단을 설립하였으며, 2004년 여성의 정치권 진출과 여성의 정치 세력화를 강조하며 맑은정치여성네트워크를 출범시켰고, 2009년에는 여성운동 · 환경운동 · 시민운동 등을 지원하는 재단법인 ‘살림이’를 설립하였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녹색을 심는 여인』(1992)과 역서로 『지구를 살리는 대변혁』(1992) 등이 있다.
1998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 2000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선정 ‘김활란 여성지도자상’, 2004년에는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 2007년에는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로상, 2008년 교보생명 환경문화재단 특별공로상 등을 수상하였다. 2013년부터 현재까지 ‘박영숙 살림이상’이 제정되어 수상하고 있다.